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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콜콜한 이야기

굳이 우기자면 2005년 11월 16일은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인 셈이다. 하루 전, 나는 싸이클럽에 '동아리에 가입하고 싶다'는 글을 남겼다. 이때 동아리 회장을 맡고 있던 그는 16일 자정을 넘긴 후 답글을 남겼다. 언제든 동방에 찾아오라고. 학관을 찾은 건 그 다음주쯤으로 기억한다. 1학년 때 잠깐 사회과학 동아리 활동을 했을 때를 빼고는 통 찾지 않던 곳이었고, 동방을 안내하는 표시 같은 것 역시 없어서 길을 헤매고 있었다. '이게 뭐냐'며 투덜대던 중, 카키색 비니를 쓴 하얀 얼굴의 청년이 학관 3층 복도 벽에 비스듬히 서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제법 불량스러워보였다. '뭐지'라고 혼잣말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결국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회장님'은 내게 길을 안내해줬고, 그날 나는 어색하게 동방 한 쪽에 .. 더보기
2013년 10월의 첫 핑계 변화는 때론 핑계가 된다. 다음주부터 법조팀에서 활동한다. 후배에게 그동안 해온 업무를 넘기고, 새로운 일거리를 준비한다는 이유로 모처럼 여유있게 하루를 보내고 있다. 어제는 서초동과 광화문 일대에서 채동욱 검찰총장 퇴임식에, 보도에, 티브로드노조 점거농성까지 쓰느라 정신없었으니 그 보상이라 생각하자. 10-11월 당직 순서를 정리할 때 보니 12월이 코앞이었다. 벌써 10월의 첫 날이니, 이상하게 느낄 이유도 없다. 기록은 기억보다 어렵고, 기억은 망각보다 힘들다. 한두 번 애쓴 뒤에 쉽사리 내려놓는 하루 또는 일주일의 기억들은 증발해버린 지 오래다. 그 사이 목과 어깨는 다시 나빠지고 있고 나의 게으름과 무덤덤함의 두께는 더해간다. 가을을 탓하기엔, 제법 멀리 와버렸다. 더보기
나는 평범하니까 # 환한 불빛보다 더 환하게 웃는다.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표정이 꼭 어린아이같다. 어젯밤 찍은 사진 속 부모님 모습이다. 생각해보니 제법 오랜만에 다섯 식구가 모였다. '식구(食口)'란 말 그대로, 함께 밥을 먹었다. 사람도 늘었다. 엄마는 흐뭇한 표정으로 "사위가 사줘서 그런지 더 맛있네"라며 웃었다. 수선화가 그려진 봉투에 나와 그의 성의를 담아 건네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빠는 "부럽다"고 말했다. 돌이켜보니 가슴이 저릿할 정도로 사랑스러운 순간이었다. 부모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신데, 요즘은 표정 하나 몸짓 하나에 먹먹해진다. 나 역시 별 수 없는 사람이다. 강한 척, 다른 척해도 이제 우리집이 '친정'으로 바뀌고 명절은 다른 곳에서 보내야 한다니 기분이 묘하다. '시댁 먼저, 남편 먼저'를 자연.. 더보기
슬럼프라고 말하면 쉽다 먹고 남은 맥주를 비운 뒤 찌그러뜨린 캔을 비닐봉지에 담고 후다닥 현관문을 열었다. '입추'가 무색할 정도로 덥고 폭우가 예상되는 날씨 탓에 우산도 포기 못한 채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갔다. 8월의 첫 번째 수요일, 아무 발제거리가 생각나지 않은 지 며칠째인 아침이었다. 감정은 좀 잦아졌다. 그저 무위만 남아있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번득이거나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 아니란 점이야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계절의 문턱에 설 때마다 한없이 처지는 마음은 지인들도 알아챈 지 오래다. 그런데 요즘은 그 무기력증이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침마다 머릿 속은 하얗고, 아무리 스마트폰 자판을 투닥여봐도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남는 것은 없다. 초기 단계라 할 수 있는 '주변 사람과 불화'는 일단 통과했다. 그러니 더더욱 .. 더보기
무려 한 달 10일 동안 블로그에 아무 것도 쓰지 못했다. 6월 28일에 도배하고, 29일에 이사하고, 30일부터 7월 1일까지 짐정리하고, 그릇 사고, 이후 냄비 바꾸러 남대문시장에 또 가고. 중간에 투쟁 끝에 책장을 얻어냈고 상은이는 오디션을 봤고, 미희네 커플과 만났고, 어머니가 오셔서 '정성의 결정체' 잡채를 해드렸다. 아, 며칠째 감기로 시름시름 앓고 있다. 기록할 일도, 생각할 일도 분명 많았을 텐데 덧없이 흘러간 시간을 복기하면 늘 짜증이 먼저 솟는다. 아니, 어쩌면 짜증으로 위장한 아쉬움일지 모르겠다. 하루하루가 참 귀한데, 오늘도 그저 흘러가는구나. 종일 골골대며. 그나저나 남은 잡채랑 불고기랑 도토리묵 등등은 언제 다 먹지... 더보기
이게 다 OO때문이다. 우리는 약속했다. "텔레비전을 놓지 말자!" 거실 한쪽 벽을 책으로 가득 채우고, 가운데에 널찍한 탁자를 두기로 했다. 카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탁자 위에서 밥을 먹고 글도 쓰고 책을 읽는 꿈을 꿨다. 합의는 쉬웠다. 그런데 '진격의 결혼준비'를 시작하며 '의외의 벽'에 부딪혔다. 바로 '부모님의 기준'이다. 엄마는 말했다. "TV도 안 해왔다는 소리 나온다니까?!" 예비 시부모님이 어떤 분들인지 나름 열심히 설명드렸고, 엄마도 그 이야기에 동의하면서도 거듭 강조했다. "나중에 어른들 집에 와서 어색하고 심심한데 TV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니니." 결국 우리는 백기를 들었다. '장롱은 필요없다'는 결론도 진작에 내렸다. 옷이 많은 편이 아니고, 번거로운 일은 딱 질색인 성격이라 이사 다닐 때마다 .. 더보기
팔랑거리지 않고, 허우적대지 말고 "당신과 함께 늙고 싶어요(Growing old with you)." 촌스러운 곱슬머리의 아담 샌들러가 불안정한 음정으로 노래하던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멋진 프로포즈라고 생각했다. 영원한 사랑을 헛되이 말하는 일보다 더 아름답고 무거운 말이 '함께 늙고 싶다'는 이야기라고, 언젠가 나도 이 말을 건넬 누군가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벌써 10여년 전 일이다. 그 시절 '어떤 사람들은 외로움으로 만들어져서, 외로움이 빠져나가면 무너져버린다'는 소설 속 구절을 경전삼아 살던 소녀는 이제 사람들 속에서 웃고, 떠들고, 술잔을 기울이는 20대 여성이 됐다. 학생회관 복도에서 담배 피는 모습이 불량스러워 보였던 한 남자와 인연도 맺었다. 가을이 오면, 그와 '함께 늙어가자'는 약속도 한다. 자연스레 '결.. 더보기
하릴없이 하루하루를 견뎌내 트위터에서 마음에 드는 글을 리트윗한다. 페이스북에 어줍잖은, 어설픈 유머를 남긴다. '좋아요'를 누른다. 사람을 만나고, 기사를 쓰고, 또 쓰고, 피곤에 쩔어 주말이면 온몸이 기진맥진하고, 그래서 잠을 자고, 또 자고 그렇게날들은 계속 소멸되어 간다. 감정을 쏟아내는 요령은 줄고, 감춰버리는 시간은 많아진다. 가면 아닌 가면 속에서 울고 웃고 화내는 일들에 또 한 번 피곤함을 느낀다. 지치진 않았는데, 지쳐가는 기분이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