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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

희대의 스캔들은 이제 그만 '희대의 이혼 스캔들', 그 왕관의 주인공이 바뀌었다. 이혼을 위해 국교를 바꾸고 스스로 교회의 수장에 올랐던 영국의 헨리8세에서 14년간 결혼사실을 숨기며 신비주의 전략을 고수해 온 대한민국의 서태지로. 지난 10여 일 동안 신문 지면과 포털 사이트를 가득 채웠던 것은 바로 그와 그의 전처와 그들을 둘러싼 무수한 이야기들이었다. '사상 초유의 스캔들'은 9시 뉴스까지 진출해 서태지와 이지아를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은 찾기 힘들게 만들었다. 비밀과 거짓말로 쌓여 있는 개인사에 수많은 사람들이 눈과 귀를 집중했다. BBK 사건 관련 보도가 허위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결난 일이나 금산분리 완화의 주춧돌을 마련한 격인 공정거래법 개정 추진 등은 그 열광의 10%는 얻었을까? 선뜻 답하기 어렵다. 사실 서태지-이지.. 더보기
이유는, 없다 열정과 무모함의 경계에서… 존 크라카우어의 “그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1923년, 거듭되는 실패에도 또 다시 에베레스트에 오를 준비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조지 리 멜로리는 답했다. 해발 8844미터, 세상에서 가장 높다는 두바이 버즈칼리파빌딩의 10배가 조금 넘고 우리나라 63빌딩의 33배가량인 높이다. 눈으로 뒤덮인 거대한 암석덩어리를 정복하겠다는 꿈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쉽사리 이해하기 어렵다.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의 저자 존 크라카우어 역시 “에베레스트에 가지 말아야 할 타당한 이유들은 너무나 많았다”고 한다. 그곳에 오르려하는 건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에베레스트를 찾는다. 크라카우어 말마따나 ‘현명한 분별’은 ‘.. 더보기
그 눈(雪)을 계속 볼 수 있을까 수 만년 동안 하얀 빛을 자랑해 온 산, 원주민들은 만년설로 뒤덮인 그곳을 ‘빛나는 산, 킬리만자로’라고 불렀다. 하지만 20년 후에도 킬리만자로의 빛나는 하얀 봉우리를 보기는 힘들 것이란 소식이 들린다. 점점 따뜻해지고 있는 지구의 체온이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을 녹이고 있다. 북극곰이 두 발을 딛고 있는 빙하도 녹이고, 남태평양 섬나라 투발루 국토의 대부분을 바닷물에 잠기게 하고 있다. 소리 없이, 그러나 무서운 속도와 힘을 자랑하며 기후변화 문제는 그렇게 지구상의 모든 것들을 위협하고 있다. “기후변화는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도전”이라는 대통령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도록 한다. 다만 “그 해법은 원자력”이란 말까지 동의하긴 어렵다. 정부는 기후변화의 대응책으로 원자력 발전 비중을 현 36%에서.. 더보기
'인문학스러운' 글, 정체가 뭐니? 이달 모임 지정도서인 '광장의 문화에서 현실의 정치로' 中 4장 '민주주의와 인권 : 부성적 권위의 종언을 둘러싼 몇 가지 고찰' 발제를 맡았다. 첫 문단을 읽을 때부터 화가 났다. 지금도, 나는 저자가 도대체 '부성적 권위의 종언을 둘러싼 어떤 고찰'을 보여주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물론 '권위적인 것'에 대한 비판, 그리고 우리의 자각과 저항을 의도했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네그리에 라캉에 영화 '밀양' 평론까지, 이런저런 어려운 '썰'로 꾸며진 글은 아무런 지적 흥미도, 자극도 주지 못했다. 며칠 전 트위터에도 썼지만, 어려운 개념과 유명인의 권위가 아니라 쉽고 정확한 단어들이 의미를 제대로 전달할 때 좋은 글이 만들어진다. 아무리 많이 알고 똑똑한 사람이라 해도, 읽히기 위해 쓴 글이 어렵고 현학적.. 더보기
우리를 어루만져 줘야 할 때(Fix us) 핀 조명 하나가 무대 중앙을 비추고 있다. 어둠 속, 유일하게 밝은 그 자리에서 육중한 거구에 호흡을 돕기 위한 튜브를 코에 연결한 노인이 노래를 시작한다.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했을 때…내가 당신을 어루만져 줄게요(fix you)." 영화 에서 가장 마음에 남은 장면이다. 동료를 잃고, 늙음의 슬픔과 죽음의 공포에 맞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들에게 건네는 이 한 마디에 참 많이 울었다. 하지만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일만으로 견디기에는 세상의 불안과 위험은 갈수록 우리를 두렵게 한다. 대한민국이란 좁은 땅덩어리에서 너무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더욱 그렇다.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 경제활동인구의 절반가량이 비정규직이고, 요람부터 무덤까지 엎치락뒤치락 경쟁하며 살아가는 삶. 그것이 2011년 .. 더보기
현대차의 아이히만 "오늘 저녁은 다행히 김밥 1줄이네요. 밖에 있을 땐 김밥..1줄..간식이라 여겼는데 여기서 너무 배부르게 느껴지네요" "하느님 이불이랑 쌀밥 좀 주세요"라고 빌던 그는 감사의 기도를 올렸을까?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얇은 스티로폼 은박지를 깔고 새우잠을 자고 있는 현대차 비정규직 @mnmnpa님이 올린 트윗 중 일부다. 15일 시작된 현대차 울산공장 비정규직 농성. '공정한 사회'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를 꿈꾸며 '법치'를 외치는 대통령이 있는 이 나라에서, 그들의 주장은 "법을 지키라"였다. 하청업체의 비정규직원과 2년 넘게 계약을 유지하면, 원청인 현대차에 직접 고용된 것과 다름 없다는 대법원의 판결을 이행하라는 것이 그들의 요구였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며 열두명이 김밥 한 줄을 나눠먹고.. 더보기
20대 루저론말고, "20대여 토익책을 덮고 짱돌을 들라" 몇 년 전 크게 화제가 됐던 우석훈·박권일의 『88만원 세대』 겉표지에 있던 문구다. 그리고 촛불 시위가 있었고, 10대 소녀들이 대거 집회에 참여하면서 20대는 또 한 번 '사회의 루저'로 낙인찍혔다. 올 지방선거 때도 '20대가 제발 투표 좀 해야 한다'는 말들이 트위터, 인터넷 게시판에 가득했다. 실제로 트위터에서는 20대의 투표 참여를 독려하는 이벤트가 벌여졌고, 나 역시 덕분에 그림 한 장을 얻었다. 20대의 투표율이 얼마나 높아졌는가를 아직 확인하진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번 지방선거 투표율은 몇 년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내 생전 그토록 재밌고 손에 땀을 쥐게 한 개표 방송은 2002년 대선 이후 처음이었다. 지자체장들은 정권교체 수준으로 물갈이됐다. .. 더보기
한계를 알아야, 더 잘난 사람이 되겠지 사람은 모름지기 한계를 알아야 한다, 특히 나 같이, 다른 건 몰라도 능력 면에서는, 큰 굴곡 없이(내가 잘났다는 게 아니라 운이 좋았고, 딱히 능력 평가를 받아야될 상황도 없었기 때문이다;) 살아온 사람은 더더욱. 이런 사람들, 아니 나의 특징은 이렇다. 남한테 인정 받는 게 삶의 활력소요, 엔돌핀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워커홀릭스럽게 되고, 일을 만들어서 하고 맡은 일은 어지간하면 남한테 도와달라고 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내가 끝내야 한다는, 그래야 완벽하다는 착각에 빠지고 만다. 한계를 느낄 때가 분명 있다. 내 경우 그 벽을 절감하는 상황은 대부분 "아는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다. 토론은 차라리 쉽다. 토론을 한다는 건, 그만큼 의견이 확고하고 나름의 논리를 준비해놨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