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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

현대차의 아이히만

"오늘 저녁은 다행히 김밥 1줄이네요. 밖에 있을 땐 김밥..1줄..간식이라 여겼는데 여기서 너무 배부르게 느껴지네요"

농성장에 하나 뿐인 화장실을 이용하려고 줄을 선 현대차 울산공장 비정규직 노조 농성자들


"하느님 이불이랑 쌀밥 좀 주세요"라고 빌던 그는 감사의 기도를 올렸을까?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얇은 스티로폼 은박지를 깔고 새우잠을 자고 있는 현대차 비정규직 @mnmnpa님이 올린 트윗 중 일부다. 15일 시작된 현대차 울산공장 비정규직 농성. '공정한 사회'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를 꿈꾸며 '법치'를 외치는 대통령이 있는 이 나라에서, 그들의 주장은 "법을 지키라"였다. 하청업체의 비정규직원과 2년 넘게 계약을 유지하면, 원청인 현대차에 직접 고용된 것과 다름 없다는 대법원의 판결을 이행하라는 것이 그들의 요구였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며 열두명이 김밥 한 줄을 나눠먹고, 누군가 제 몸에 불을 붙이게 했던 그 회사는 현금성 자산이 약 8조원이라고 한다. 0이 12개 붙는 숫자다. 잔고가 아주 많을 수밖에 없는 월급날, 입금 순간에만 0 여섯개를 찍는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억, 조 입에만 붙는 단어다. 수천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했던 최고경영자는 비정규직들이 공장을 점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첫 마디를 뭐라고 내뱉었을까. 노동자의 파업은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행위, 사회의 불신과 갈등을 조장할 뿐 아니라 천문학적 피해를 안기는 비경제적 행위로 매도된지 오래다. 몸뚱이에 불이 붙어도, 텔레비전에서는 화려한 솜씨로 아시안 게임을 제패하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모습만 비춘다.

그 누구도 일러주지 않았다. 신념 없이 욕망대로, 그렇게 흘러가는 삶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먹고 살기 위해 누군가를 짓밟고 누군가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무감각하고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은 '아이히만'을 닮아간다. 그는 악마도, 정신이상자도 아니었다. '타인의 관점'에서 '사유'할 능력도, '행위'할 능력도 없었을 뿐이다. 아이히만이 무감각하고 무덤덤하게 '홀로코스트'란 비극의 조연 역할에 충실했던 이유다. 반유대주의자는커녕 유대인에게 호의적이었던 그가, 유대인과 지구를 공유하는 것을 거부하는 일에 앞장 선 까닭은 '일을 잘하고 싶어서'였다.  하는 일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관심조차 없었다.

젊은 날의 한나 아렌트, 그리고 예루살렘 법정에 선 아이히만


우리는 아이히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살아남기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남을 외면해야 한다고 강변하며 살아간다. 정당화하며 살아간다. 죄책감 혹은 연대감을 느끼면 다행이라며 자위한다. 그게 '나'다. 안타까움과 고뇌가 담긴 멘션 한 번, 관련 내용 리트윗(RT) 한 번으로 안도한다. 나는, 우리는 딱 거기까지다. 괴물 같은 세상은, 우리를 괴물로 만들었지만 괴물이 된 우리는, 세상을 더 괴물 같게 만들고 있다. 두렵다.

그럼에도 희망을 말하고 싶다. 희망을 믿는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무뎌져 가고 있지만, 아직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다고. 이불과 쌀밥을 기도하는 청년에게 응원의 한 마디를, 안타까움과 미안함의 말들을 건네는 모습들에서 나는 '변화'를 믿어본다. 아렌트의 말대로 "우리 모두의 안에 아이히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아이히만을, 타인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 마비된 사유에 조금씩 저항하고 있다. 저항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함은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원죄가 되어버렸지만, 열 사람의 한 걸음, 천 사람의 한 걸음이 모여 속죄의 길을, 희망의 길을 찾고 있다. 우리 안의 아이히만을 깨닫는 건, 어쩌면 그 저항의 첫 걸음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