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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잊는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짧은 한 마디가 전부였다. 며칠 뒤 한강에는 더 이상 날숨을 내뱉지 않는 한 남자가 있었다. 언론은 ‘트위터로 예고된 최초의 자살’이라며 앞다퉈 보도했다. 검은 근조리본을 본 딴 이모티콘(▶◀)을 붙인 글들이 많아졌다. “명복을 빕니다, 편히 쉬세요.” 죽은 자는 듣지 못한다. “그 용기로 좀 더 버티지….” “자살이란 말을 거꾸로 하면 ‘살자’라는데…”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듣지 못하고 말 없는 그가 한 줌의 재로 변했다. 트위터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추모의 140자도 사라졌다. 산 자는 망각의 동물이다.
 
너무 많은 죽음들이 우리 주변에서 목격된다.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고, 매일 40명  가량이 스스로 생을 마무리 짓는다는 ‘자살공화국’이 대한민국의 또 다른 별명이다. 부끄러운 이름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보다 빠른 속도로, 우리는 사람들의 죽음을 잊는다. 어쩌면 안도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비겁한 출구전략을 택한 겁쟁이, 낙오자, 실패자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일보다 ‘살아있음에 감사하자’는 잠언 같은 목소리만 들린다. 타인의 비극에 공감하는 건 찰나에 불과하다. 자신의 해피엔딩이 제일 중요하고, 그 행복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어야 하지 않냐’고 믿어 온 우리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굳게 믿은 나머지 각자의 생존을 택했고, 타인의 고통에 무뎌졌다. 금붕어 못지않은 기억력을 자랑하며 타인들을 지워나갔다.
 
타인의 고통을 쉽게 잊은 사람들은, 그 고통을 쉽게 말한다. 누군가의 죽음은 반짝 관심을 끄는 가십거리로 그쳐버린다. 그의 삶이 얼마나 비극적이었는지, 우울증을 앓았다든지 하는 내용들만 부각될 뿐이다. 한 사람의 비극이 개인 몫으로 설명되고 나면, 더 이상 사람들은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하지 않는다. 또 다른 비극이 발생해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지금껏 반복되어 온 악순환이다. 해마다 만 명이 넘는 사람이 자살을 택했어도 변한 것은 없다. 누구나 “공동체가 파괴되고, 무한경쟁만 반복되는 병든 사회가 갈수록 자살이 늘어나는 주요 원인”이라는 전문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각자, 알아서 살아남는 것’을 유일한 생존법으로 아는 우리들은, 다시 각개전투 태세를 취한다.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무엇이냐”는 말에 다수가 공감하고, 경쟁에서 살아남는 일이 지상 최대의 과제란 말을 요람부터 무덤까지 듣고 사는 사회 구성원들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2백년 전 에밀 뒤르켕이 <자살론>이란 책 한 권을 통해 했던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회가 개인에게 얼마나 소속감과 삶의 의미를 줄 수 있는지가 자살률 증감에 영향을 준다는 말은 몇 년째 강조되고 있다. 그럼에도 수많은 죽음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전직 대통령, 연예인, 기업인, 교수, 고등학생 등 누군가의 비극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는 ‘지못미’라며 근조리본을 단 글 하나씩 쓰고 고인의 명복을 기원했다. 한편으론 “나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아 다행”이라며 안도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란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자살은 나약한 개인의 선택”이라 여긴 것이 모두의 진심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우리는 죄책감을 덜었을 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없다. 오늘도 한 사람이 죽었다.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없으나,
그것을 바꿀 수 있는 '개인'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다.
한편으론 냉소적이거나 비관하는 부분도 늘었다. 나 역시 무책임하고 다수 속으로 숨어버리는 개인 중 하나란 걸 더 뚜렷하게 인식한다. 착각했다. 그들과 나는 다르지 않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워진다. 한 편의 글을 쓴다는 것, 그 속에 논리를 담아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이 과연 얼마나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을까? 의심하는 까닭은, 그 생각들이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니고, 그 생각대로 내가 움직이지 않고 있어서다. 말과 글로 표현하긴 쉽지만, 행동하기는 어렵다. 복지국가, 표현의 자유, 생활정치, 권력을 비판하고 환경을 보호하며 수많은 '소수자'들의 편에 선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 '누구나'에 속하지 않기에, 많은 걸 희생해야 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있다.

나는?  희생하려는 사람은 아니다. 애초에 이 일을 택한 건 나의 욕망을 얼마나 현실적으로 구현할 수 있느냐, 나의 능력을 얼마나 써먹을 수 있느냐는 고민 끝에 나온 답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섣불리 '대안'이라는 것을 말하기 어렵다. 비겁한 일일 수도 있지만, 나는 내가 말한 대안이 고민과 좌절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에, 머리론 동의해도 가슴을 움직이지 못했고, 무거운 엉덩이는 껌처럼 의자에 붙어있기 때문에, 책임지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말하기 어렵다. 스터디를 하고 책을 읽으며 좋은 글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막상 완성본을 보면 냉소하게 되는 이유다.

그나마 부끄러움을 알면 다행인 걸까? 이제는 그 말조차 위선으로 느껴진다.
핑계는 그만 대고,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험이 코 앞으로 다가오면, 다시 백면서생이 된다. 변화를 믿는다면서 변화의 순간엔 철저히 고인 물에 머물러 있다. 이 딜레마가 좀 해결되어 내 숨통을 약간이라도 트여줄 길은 역시 합격뿐인가...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