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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

'허세'를 경계하며 살아가기

'열심히 하지 않았다, 노력하지 않았다'는 말들로 끝맺는 건 누구에게나 익숙하고 쉬운 일이다.
일을 만들거나 엄격한 생활습관이 일정 수준 유지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드는 나 역시 사람을 볼 때 결과적으로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생각을 하는 게 잦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가 머리로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고, 돌발변수도 많다. 능력과 노력이 늘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는 경우도 있다는 걸 조금씩 알게 된다. 물론 '성실함은 재능을 이긴다'고 믿고 '하면 된다'는 생각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인정하게 된다고나 할까?

학교 안에 있을 때는 몰랐다. 아니 알았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납득할 수 없었다. '나의 실패'는 스무해 조금 넘게 살아오는 동안 체감하지 못한 단어였고 주변 사람들도 비슷비슷했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일보다는 인정받는 일 또는 대접받는 일이 더 익숙했다. 앞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했다. 머리로야 골백번 넘게 '학벌은 불합리해, 철폐돼야 해'라고 생각했지만 학벌사회의 수레바퀴 아래 살아가고 있는 나는 결국 그 수혜자였으니.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과 달리 '정말 바뀔 수 있을까?'란 의문이 남았고 '바꾸자'는 내 몫이 아니라고 여겼다.

순응적인 사람이다, 나는.
정해진 틀에 딱 맞게, 모범적으로 살아온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그게 나였고, 변화를 말하면서도 변화를 거부하거나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였다.

그 입장에서 솔직히 많이 변하지 않았다. 다만 '실패'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건 큰 변화다. 나의 실패는 물론 타인의 실패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인풋이 있음 분명 아웃풋이 있기 마련이라고, 알고리즘처럼 세상이 움직인다고 여겼던 건 짧은 식견이었다. 노력하지 않아서 실패하지 않는 사람들은 분명 존재한다. 또 노력해도 실패하는 사람들이 있고, 노력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을 구분하지 않는다. 노력하지 않았고, 무능력한 탓에 실패는 당연한 결과물인양 말한다.

얼마 전 후배의 다이어리에서 "내가 무식하면, 스펙이 없으면 아무도 내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는 내용의 글을 봤고, 친구는 "물론 일부만 그런 것이지만, 노력하면 되지 않냐'는 이야기를 했다. 능력이 사람의 등급을 결정하는 사회에선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능력을 보는 첫번째 기준을 '학벌'로 세운 땅에서 살아간다. 불안한 엄마들은 아이 손을 잡고 학원으로 달려가고, 아빠들은 기러기 생활을 감수하면서까지 돈 버는 기계가 되는 그런 나라다. 실업계 고교를 다니면 자동으로 '문제아, 날라리'가 되는 아이들에게 아무도 꿈을 묻지 않는다. 서울대의 나라니, SKY말고는 대학도 아니라느니 하는 말들을 누구나 자연스레 내뱉는다.

문제는 그 '스펙'이 개인의 실질적 능력을 보장한다고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후배가 말한 스펙은 약간 정의가 다른 듯하다). 보통의 경우 높은 토익 점수와 좋은 학점, 괜찮은 학벌은 경쟁의 사다리에서 조금 높은 자리를 마련해주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세 가지가 대표하는, 스펙이란 것이 잘남 혹은 무식함을 결정짓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다만 자주 잊을 뿐이다. 망각의 횟수가 잦아지고, 강도는 더 커져 간다. 그럴수록 남는 건 개인의 무능력함, 게으름 등등 그의 잘못이다.

어쨌든, 능력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점점 불행해지는 것 같다. "능력 or 노력이 없으면 불이익을 받는 건 당연하다"는 말이 두 지인의 속뜻은 아니었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결국 이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 역시 의식하지 않으려 할 뿐 내심 머릿속에선 굳어 있는 생각일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의식하지 않고, 섣불리 인정만 하지 않으려 하는 까닭은 그 인정과 믿음이 온전히 내 것이 된다면 청소부 아저씨와 아주머니, 지하철의 걸인과 공원의 노숙자, 비 오는 거리를 힘겹게 지나가던 휠체어 탄 장애인을 보며 느꼈던 시선과 마음의 불편함이 한갓 '허세'에 그쳐버릴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공무원들과 함께 탄 엘리베이터에서 반갑게 "소희야"라고 부르는 청소부 아주머니를 본 순간 '아..이럴 때는 좀'하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K모 의원실 비서 박소희'고 그들에게 '식사 대접' 받는 '박 비서'였는데, 아주머니가 나를 부르는 순간, 내 지위가 하락했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을까? 부정하고 싶지만, 그랬다. 비정규직을 돕고, 최저임금 간신히 받으며 고된 업무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이상과 직접 몸으로 겪는 현실이 부딪칠 때마다 마음이 무겁고 머리가 복잡하다.

'스펙 없으면 인정 못 받고' '노력 없으면 안 되는' 현실을 인정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다. 일말의 특권을 누리고 있고, 남들과 구분 짓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답습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세상에서 나라고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러기엔 노력해도 스펙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곳, 낮은 곳에서 각자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스펙과 능력을 갖췄다고 해서 그들을 내려다볼 자격은 아무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