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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

20대 루저론말고,

"20대여 토익책을 덮고 짱돌을 들라" 몇 년 전 크게 화제가 됐던 우석훈·박권일의 『88만원 세대』 겉표지에 있던 문구다.

그리고 촛불 시위가 있었고, 10대 소녀들이 대거 집회에 참여하면서 20대는 또 한 번 '사회의 루저'로 낙인찍혔다. 올 지방선거 때도 '20대가 제발 투표 좀 해야 한다'는 말들이 트위터, 인터넷 게시판에 가득했다. 실제로 트위터에서는 20대의 투표 참여를 독려하는 이벤트가 벌여졌고, 나 역시 덕분에 그림 한 장을 얻었다. 20대의 투표율이 얼마나 높아졌는가를 아직 확인하진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번 지방선거 투표율은 몇 년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내 생전 그토록 재밌고 손에 땀을 쥐게 한 개표 방송은 2002년 대선 이후 처음이었다. 지자체장들은 정권교체 수준으로 물갈이됐다. 그리고 모두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얼마 전 선배에게 들었던 수잔 손탁의 글과 프랑스 연금개혁 관련 기사들을 읽었다. '촛불 당원'인 선배는



however brief, from the inhibitions on love and trust this society enforces—is never the same again. In him, the ‘revolution’ has just started, and it continues.


라는 손탁의 한 마디를 언급하며 분명 세상은 변하고 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믿는다. 애초에 그걸 믿지 않았다면, 난 기자를 준비하지 않았을 테니까. 문제는 그 변화의 가능성, 변화의 진행 방향을 떠나서 여전히 20대는 우리 사회의 루저로 낙인찍히고 있다는 것. 연금제 개혁에 대해 저항하며 거리로 나선 프랑스의 청년들을 가리키며 사람들은 말한다. "대한민국의 20대여 너희들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냐"고. 촛불집회 때도 청소년에 밀렸고, 신입사원 초봉을 30% 삭감한다고 해도 '취업만 시켜주신다면 땡큐베리감사'라는 식으로 너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며 비판한다.




사회의 문제, 그리고 어른들의 문제가 어떻게 자신들에게 파급될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행동할 줄 아는 프랑스의
고등학생들과 대학생. 당장 나부터 살고 보아야 하니까 학점관리, 영어점수관리를 하면서 옆자리에 앉은 친구들보다 어떻게 하면 앞서갈까를 고민하며, 평소에 뉴스와 신문을 멀리하다가 면접준비를 위해 시사상식사전을 펼쳐놓고 사회현상에 대해서 '열공'하는 대한민국. 이런 선명한 차이에 대해 부러움과 슬픔의 감정을 느끼는 건 저뿐일까요?



수긍할 만한 얘기지만, 이제는 지겹다. 20대 루저론은, 우리 사회의 도돌이표 중 하나다. 대안도 없고, 희망도 보여주질 못한다.

다른 삶을 꿈꾸라고 한다. 공동체를 지향하고, 친환경적인 그린 라이프를 추구하라고들 말한다. 큰 뜻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착하고 예쁜 이야기들일 뿐이다. 냉소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 착하고 예쁜 이야기들은 감동을 주지만 혁명을 가져오지 못한다. 여전히 사람들은 편의점과 대형마트에 가고,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빵을 사고 별다방, 콩다방에서 커피를 마신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라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고, 지금도 그 연속선상에 있는 걸테지만 글쎄..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비겁한 걸지도 모른다. 도대체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럼 니가 생각하는 대안이 뭐냐고 따진다면 뾰족하게 대답하기도 어렵다.

자꾸 여지를 가지려 하다보니, 오히려 혼란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한 발 물러서서 주저하는 사람이 되려다보니 불분명하고 어정쩡한 태도만 강해지는 느낌 역시 짙어져간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이다. 아니 어쩌면 억울한 걸지도 모르겠다. 결국 우리를 사회의 루저, 도시 빈민처럼 만든 건 누구인가. 더 이상 기성세대가 맛 본 성장의 열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이야기는 신화로 남은 지금, 각자의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려고 버티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나는 가끔 우리가 불쌍하다.
비관론자는 아니다. 반복되는 이야기들이 지겨울 뿐이고, 벽이 느껴지는 단어들에 답답할 뿐이다. 프랑스 청년들처럼 우리가 짱돌을 들기 원한다면, 진정 우리에게 주어야 할 기회는 직업을 얻고 돈을 버는 것이 아니다. 동물원 원숭이가 아닌 사람이 될 기회,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각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신문과 방송이 떠들어대는 이야기들, '배웠다는 사람들'이 어려운 개념과 문장을 나열하며 보여주는 사상들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이 곳에서 살아가는 나와 우리들의 생각들. 애초에 생각이 거세된 채 자라온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비판은 쉽고 이해는 어렵듯, 말하는 건 쉽고 기다리는 건 어렵다. 20대의 침묵을 비판하는 건 쉽지만, 그 침묵을 견디고 말하는 순간을 기다리는 일은 쉽지 않다. 나는 그 한 마디를 기다리는 사람이고 싶다. 아직 우리는 사회의 '을'로 조용히 순응하는 것 같지만, 우리도 한 때 촛불을 들었고, 거리로 나섰고, 투표를 했다. 다들 잊고 있는 것 같지만, 조금씩 움직여 왔다. 그래서 믿는다. 분명 '변화'는 올 것이라고. 하지만 사회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면...? 암울하다. 어느 누가 청년이 되든, 20대 루저론은 되풀이될 것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돌림노래가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