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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잊는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짧은 한 마디가 전부였다. 며칠 뒤 한강에는 더 이상 날숨을 내뱉지 않는 한 남자가 있었다. 언론은 ‘트위터로 예고된 최초의 자살’이라며 앞다퉈 보도했다. 검은 근조리본을 본 딴 이모티콘(▶◀)을 붙인 글들이 많아졌다. “명복을 빕니다, 편히 쉬세요.” 죽은 자는 듣지 못한다. “그 용기로 좀 더 버티지….” “자살이란 말을 거꾸로 하면 ‘살자’라는데…”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듣지 못하고 말 없는 그가 한 줌의 재로 변했다. 트위터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추모의 140자도 사라졌다. 산 자는 망각의 동물이다. 너무 많은 죽음들이 우리 주변에서 목격된다.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고, 매일 40명 가량이 스스로 생을 마무리 짓는다는 ‘자살공화국’이 대한민국의 또 다른 별명이다.. 더보기
강용석도 그렇고, 비가 내린다. 먹구름으로 까맣게 뒤덮인 하늘은, 시(時)감각을 앗아간다. 늦잠 자고 일어나 시계를 보면, 오후 4시인지 새벽4시인지 분간할 수 없는 그런 날씨다. 낮과 밤을 혼간하는 일이야 대수롭지않다. 문제는 시간 감각의 상실이, 시대에 맞지 않을 때다. 어느 국회의원이 "모든 걸 줘야 하는데 그래도 할래?"란 말만 그런 게 아니다. 하루가 다르게,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의미고 어떤 현실인지 인식하게 된다. 불쾌하거나 수치심을 느낄 정도로 힘든 상황을 겪지 않아도, 일상적으로 '아 그래 나는 여자구나'라고 느끼고, '우린 아직 어쩔 수 없구나'를 깨닫는다.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이긴다'는 마케팅용어는 너무 쉽게 남발되지만,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결국 여성의 전형성을 상징할 뿐 아니라.. 더보기
'허세'를 경계하며 살아가기 '열심히 하지 않았다, 노력하지 않았다'는 말들로 끝맺는 건 누구에게나 익숙하고 쉬운 일이다. 일을 만들거나 엄격한 생활습관이 일정 수준 유지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드는 나 역시 사람을 볼 때 결과적으로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생각을 하는 게 잦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가 머리로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고, 돌발변수도 많다. 능력과 노력이 늘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는 경우도 있다는 걸 조금씩 알게 된다. 물론 '성실함은 재능을 이긴다'고 믿고 '하면 된다'는 생각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인정하게 된다고나 할까? 학교 안에 있을 때는 몰랐다. 아니 알았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납득할 수 없었다. '나의 실패'는 스무해 조금 넘게 살아오는 동안.. 더보기
예비언론인들의 당찬 도전 '단비뉴스'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에서 반 년 가까이 준비해 온 웹진 가 문을 열었습니다. 제안한 본인으로, 정작 활발히 활동하지 못해 미안한데 몇명 찾지 않는 블로그지만 이렇게라도 홍보를 좀 해야겠네요. 다들 많은 스트레스와 압박감에 시달리며 고생한 터라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http://www.danbinews.com http://twitter.com/danbi_news 더보기
꼰대에 관한 짧은 글 '꼰대'를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다음 지식에 따르면 두 가지 의미다. '대장, 우두머리, 선생님'을 일컫는 은어면서 '지배자'를 뜻하는 전라도 사투리. 좀 더 정확하게, 국립국어원 홈페이지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검색해봤다. 은어로 '늙은이' 또는 '선생님'을 가리키는 말이란다. 갑자기 왜 꼰대냐 하면, 요즘 들어 부쩍 쓰게 된 단어다. 예전에는 비슷한 의미를 전달하려고 해도 이 단어를 쓰진 않았던 것 같은데, 이젠 입에 슬슬 붙고 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먼저 '꼰대'란 단어를 꺼내기보다는, 그 말이 나온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계속 하기 위해서, 그 맥락을 유지하기 위해서 '꼰대'란 단어를 쓴 경우가 많다. 또 그 상황은 대개 '꼰대'라는 말을 꺼낸 사람이, "나는 꼰대가 아니다"라는.. 더보기
전쟁을 기억하다 또는 망각하다 ‘직시’하는 예술에 관하여…서경식의 『고뇌의 원근법』 ‘예술과 현실, 둘의 간격을 얼마나 유지해야 하는가?’ 그 오랜 물음이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논의된 때는 1967년이다. 불씨를 피운 것은 젊은 평론가 이어령이었고, 잘 마른 나무를 보태 논쟁의 불을 키운 것은 시인 김수영이었다. 주거니 받거니 8편의 글이 오고 갔다. 문학의 순수성과 사회적 역할을 각각 옹호하는 두 사람의 글은 정교했고 풍성했다. 세상의 관심도 뜨거웠다. 그만큼 쉽게 끝맺을 수 없는 화두였다. 재일학자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는 아마도 김수영 시인의 손을 들어줄 것 같다. 세 번째 미술에세이집 『고뇌의 원근법』에서 그는 몸집만큼 진중하게, 하지만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말한다. 예술이란 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그려내는 일이라고, 예술은.. 더보기
촛불, 그리고 조선일보 세상은 확실하지 않다. 일정한 법칙과 과정에 따라 정확한 답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수학 뿐이다. 하지만 세상사는 수학 문제 풀리듯 풀리지 않는다. 불확실성이 우리를 지배한다. 2년 전 '광우병 쇠고기' 논란이 일었을 때도 그랬다. 정부의 원칙없는 협상 결과, 민주주의에 대한 몰상식, 국민과의 불통 등은 3개월여 서울의 밤을 밝힌 촛불을 설명하는 대표 문구들이었다.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어쭙잖은 STS 지식이었지만, 문제는 불확실한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위험'을 대하는 방식에 있다고 봤다. '광우병 쇠고기를 먹으면 인간 광우병에 걸릴 수 있다'는 건 하나의 위험이다. 그 일이 실제 일어날 확률은 매우 낮다. 하지만 위험의 크기는 거대하다. 파괴적이다. 확률에 상관없이 우리가 두려워 할 수밖에 없다.. 더보기
나를 열폭하게 하는 것 또 해마다 35만명의 임신부가 설마 취미삼아 낙태를 일삼진 않을 게다. 이때 현행법을 엄격히 적용해 35만 낙태 시도를 무력화하는 게 온당할까? 아니면 차라리 지키지 못할 법을 이 기회에 뜯어고치고 사회안전망 확충의 계기로 삼는 게 타당할까? 인간의 사랑은 완벽하지 않다. 기계처럼 통제하기도 어렵다. 원치 않은 임신과 낙태는 강간처럼 불행한 사건이 초래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정상적 남녀가 악의 없이 정사를 나누다 발생한다. 이들을 다 엄단해야 할까? 두 남녀의 원치 않은 출산을 공권력이 집행하고 둘을 강제로 결혼시켜야 할까? 반이정, '잘못 그려진' 낙태반대론 굳이 이런 식의 연결 고리를 만들고 싶진 않지만, 나는 '여성의 날'에 태어난 '여성'이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기분이 묘했다. 사회적으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