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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

나를 열폭하게 하는 것


또 해마다 35만명의 임신부가 설마 취미삼아 낙태를 일삼진 않을 게다. 이때 현행법을 엄격히 적용해 35만 낙태 시도를 무력화하는 게 온당할까? 아니면 차라리 지키지 못할 법을 이 기회에 뜯어고치고 사회안전망 확충의 계기로 삼는 게 타당할까?

인간의 사랑은 완벽하지 않다. 기계처럼 통제하기도 어렵다. 원치 않은 임신과 낙태는 강간처럼 불행한 사건이 초래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정상적 남녀가 악의 없이 정사를 나누다 발생한다. 이들을 다 엄단해야 할까? 두 남녀의 원치 않은 출산을 공권력이 집행하고 둘을 강제로 결혼시켜야 할까?


반이정, '잘못 그려진' 낙태반대론

굳이 이런 식의 연결 고리를 만들고 싶진 않지만, 나는 '여성의 날'에 태어난 '여성'이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기분이 묘했다. 사회적으로 '여성'이라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조금씩 알게 되던 시기였으니까. 그리고 그 의식은 갈수록 뚜렷해진다. 하나 둘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강해진다고나 할까? 성별에 기반한 분류법은 자칫 오해를 살 수 있어 조심스럽긴 하지만, 아무튼 나는 여자고 여자라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과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 대표적인 게 생리다. 남자들에게 아무리 이성적으로 설명해도 그들은 절대 '공감'할 수 없는 문제다. "여성의 경험을 모르면 여성을 지지하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 과정이 어떤지 자체를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란 말이다. 경험의 절대적 부재를 극복할 수 없으니까. '생리'를 두고 남녀가 다투는 대표적인 문제가 바로 '생리공결제(생리휴가)'다. 업무상의 효율성을 떠나서, 여성이라면 어느정도 생리공결제 도입에 심정적 지지를 하게 된다. 그때 당시의 불쾌함과 우울함, 불편함 등을 알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여성이기에 더더욱 공감하고 분노하게 되는 문제가 바로 '낙태'다. 낙태를 찬성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아니, 있다고 한들 그들이 '낙태를 허하라'고 외치는 까닭은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상황에서만큼은 인정하자는 뜻이다. 하지만 낙태 문제를 논의할 때 가장 큰 목소리는, '낙태=생명 경시'라는 공식을 외치는 사람들이다.



-낙태가 허용되어 있는데도 ‘선택권이 없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지?

“선택이란 ‘자유’가 있을 때 주어지는 것이다. 가끔씩 연례행사로 신문에 한국이 ‘낙태천국’이라고 보도가 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언론은 여성들이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식으로 몰고 갔지만, 정말은 ‘한국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나라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원치 않는 임신을 했을 때 과연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있는지.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낙태는 선택이 아니라 강제적인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일다 블로그, 이숙경(웹진줌마 대표) 인터뷰 중에서


그때마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진심으로 낙태 시술을 받는 여성들이 '생명을 귀히 여길 줄 몰라서' 그런다고 보냐고. 불법낙태가 횡행한 이유는, 우리 사회에 생명경시 사상이 만연해져서가 아니다. 아이를 낳아 키울 자신이 없어서다. 미혼모라는 낙인과 사회·경제적 부담 등이 '아이를 낳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만든다. 100번 양보해서 이 모든 게 핑계라고 하자. 그렇다고 낙태 경험 있는 여성들이 과연 아무렇지 않게 잘 살 거라고 믿는가? 그들은 부도덕하고 문란하고 생명을 중시할 줄 모르기에 '그깟 낙태'쯤은 별일 아닌 것처럼, 훌훌 털어버릴 것 같은가? '낙태=생명 경시'라는 공식은 여성들을 부도덕하고 문란하며 생명이 귀한 줄 모르는 '비윤리적' 인간으로 공격한다. 동시에 낙태의 원인, 즉 임신의 계기를 함께 만들었을 '남성'의 존재는 사라진다. 남는 건 비윤리적인 여성뿐이다. 그를 '비윤리적'이게 만든 것은 과연 그의 잘못뿐인가? 낙태를 생명 문제로만 바라보면 개인의 책임만 부각된다. 그리고 그를 '무책임'하다고 말하는 대중들은 자신의 비교우위를 확인하고 곧 무관심해진다. 무관심한 대중들이 모인 사회는 개인에게 더 잔혹한 곳이 된다.

그래서 낙태 문제를 접하면 더 화가 난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하고, 논리적으로 타당함을 따져가면서 이야기해도 무조건 낙태를 근절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낙태 문제를 도덕적 차원에서 다뤄선 절대 나올 수 없다. 그럼 모두가 조선시대처럼 남녀칠세부동석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삼강오륜 등의 고전을 달달 외우며 '도덕적 인간'으로 거듭나려는 노력을 부단히 한다면 과연 낙태 문제가 해결될까? 도덕을 말하고 싶다면 우선 낙태 시술을 받는 여성들의 마음부터 헤아릴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들의 가슴에 주홍글씨를 찍기 전에. 도덕을 말하면서 도덕적 해법도 제시하지 못한 채 '법'이라는 강제적 수단을 동원해 금지하려는 것은 도덕적이지도 않다. 차라리 솔직하게 이것이 도덕적 문제가 아님을 인정하라. 중요한 건, 어떻게는 사회적으로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만들어 지금 이 순간에도 차디찬 수술대에 누워 있을 한 어머니와 아기를 구하는 일이니까.

* 덧. 그리고 얼른 봐야 할 영화


덧2. 읽어보면 좋을 글.
영아유기·살해는 그들만의 책임일까(미디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