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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

전쟁을 기억하다 또는 망각하다


‘직시’하는 예술에 관하여…서경식의 『고뇌의 원근법』

‘예술과 현실, 둘의 간격을 얼마나 유지해야 하는가?’ 그 오랜 물음이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논의된 때는 1967년이다. 불씨를 피운 것은 젊은 평론가 이어령이었고, 잘 마른 나무를 보태 논쟁의 불을 키운 것은 시인 김수영이었다. 주거니 받거니 8편의 글이 오고 갔다. 문학의 순수성과 사회적 역할을 각각 옹호하는 두 사람의 글은 정교했고 풍성했다. 세상의 관심도 뜨거웠다. 그만큼 쉽게 끝맺을 수 없는 화두였다.

재일학자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는 아마도 김수영 시인의 손을 들어줄 것 같다. 세 번째 미술에세이집 『고뇌의 원근법』에서 그는 몸집만큼 진중하게, 하지만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말한다. 예술이란 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그려내는 일이라고, 예술은 정치적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고. 묻는다. “왜 한국의 근대미술은 예쁘기만 한가?” 덧붙인다. “조선 민족이 살아온 근대는 결코 ‘예쁜’ 것이 아니었을 뿐더러, 현재도 우리의 삶은 ‘예쁘지’ 않다.” 그래서 그가 소개하는 그림들은 예쁘지 않다. 아니 추하다. 여인은 발가벗겨졌고, 찢어진 육신들과 붉은 피로 가득하다.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을,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인류 스스로 만들어낸 지옥, 전쟁. 그 어리석음과 잔혹함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을 철저히 꿰뚫어보고, 남김없이 그렸기 때문이다. 오토 딕스가 대표적이다. 19세기 말 태어난 이 독일 화가는 두 번의 대전(大戰)에 모두 참전했다. 전쟁 후 다시 붓을 든 그가 가장 많이 그린 인물 중 하나는 상이군인이었다. 팔다리가 없고, 얼굴은 일그러진 채 거리에서 구걸하는 그에게 지나가던 애완견마저 오줌을 싸며 지나친다. ‘조국을 위한다’는 부추김에 전장으로 달려갔지만, 정치‧경제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대는 그들을 외면했다. 딕스는 이 주제를 반복해 그리면서 국가권력의 독단과 자본주의 사회의 무자비함을 단적으로 표현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작업은 전쟁의 고통, 무서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이었다. 오토 딕스는 4년 동안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어 자신의 체험을 <전쟁> 제단화에 담았다. 이 그림은 출격하는 병사들, 처참한 전쟁의 현장, 파괴된 참호에서 동료와 함께 탈출하는 병사, 그리고 누워있는 자들 이렇게 네 개의 화면으로 구성된다. 마지막 그림이 제단의 밑 부분이라 순서대로 보면 꼭 시곗바늘 돌아가듯 원이 그려진다. 즉 이 제단화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아래로, 다시 위로 무한히 계속되는 전쟁의 양상이 그려져 있다.

저자는 독일 드레스덴 주립미술관의 전시실에서 <전쟁>을 관람하던 다른 사람들에게 그림의 인상을 묻는다. 여행 중인 형제는 그림이 “모든 인간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너무 잔혹하진 않느냐는 질문에 드레스덴 주민은 “아름답진 않지만 전쟁을 그린 그림으론 충분하다”며 “전쟁은 잔혹하고 무서운 것”이라고 답한다. 또 다른 주민은 “어머니에게 전쟁 이야기를 들어보면 현실은 이 그림보다 더 가혹했던 것 같다”고 덧붙인다. 오토 딕스는 “모든 인생의 천박함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전쟁에 지원했다. 그는 영웅신화 등 낭만을 벗기고, 자신의 눈으로 본 “전쟁, 악마의 짓”을 그렸다. 불안이나 패닉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무서움을 전하고 전쟁을 저지하는 힘을 일깨우기 위한” 그림이었다.

오토 딕스, 전쟁


오토 딕스는 물론 이 책에 소개된 화가들은 대부분 생소하다. 하지만 ‘시대를 똑바로 응시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비슷하다. 참전으로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고 ‘피투성이의 카니발’이란 이미지밖에 그릴 수 없었던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다윗의 별’을 단 채 살아가야만 하는 일상의 불안과 공포를 가라앉은 색채로 표현한 펠릭스 누스바움. 그들은 전쟁과 학살의 시대를 똑바로 응시해 그렸다. 그들에게 ‘전후’란 없었다. 지금 발버둥치고 있는 추한 현실을, 삶에 가득 찬 고뇌를 그려내는 것이 그들의 예술이었다.

올해는 한국전쟁 60돌이다. 3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 이 땅은 비극의 현장이었고 지옥 그 자체였다. 하지만 우리에게 전쟁은 추상명사로, 기록으로 남아버렸다. 광기와 잔인함, 고통의 증언과 기억은 쉽게 잊혔다. 그 경험에서 우리는 배우지 못했다. 전쟁은 있었으나 전쟁미술이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추한 현실과 뼈아픈 진실을 똑바로 응시하지 못해서만은 아니다. 그러나 ‘예쁘기만’ 했던 한국 근대미술이 적어도 그 망각의 속도를 부채질했을지 모른다. 적어도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원하지도 않지만 적당히 넘어가선 안 된다”고 말하는 그 분과 몇몇 사람들의 망각에는 기여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