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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

촛불, 그리고 조선일보


세상은 확실하지 않다. 일정한 법칙과 과정에 따라 정확한 답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수학 뿐이다. 하지만 세상사는 수학 문제 풀리듯 풀리지 않는다. 불확실성이 우리를 지배한다. 2년 전 '광우병 쇠고기' 논란이 일었을 때도 그랬다. 정부의 원칙없는 협상 결과, 민주주의에 대한 몰상식, 국민과의 불통 등은 3개월여 서울의 밤을 밝힌 촛불을 설명하는 대표 문구들이었다.


2008년 6월 10일 광화문ⓒ사진공동취재단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어쭙잖은 STS 지식이었지만, 문제는 불확실한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위험'을 대하는 방식에 있다고 봤다. '광우병 쇠고기를 먹으면 인간 광우병에 걸릴 수 있다'는 건 하나의 위험이다. 그 일이 실제 일어날 확률은 매우 낮다. 하지만 위험의 크기는 거대하다. 파괴적이다. 확률에 상관없이 우리가 두려워 할 수밖에 없다. 두려움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위험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의 문제는 정치인과 관료들이 전담할 것이 못 된다. 정작 위험이 현실을 덮쳤을 때 그것을 맞닥뜨리는 사람은 나와 당신들이니까.'위험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고 중요한 이유다. 나는 2008년 촛불집회의 근본적 이유는, MB 정부와 국민의 갈등 이기 전에 '위험 커뮤니케이션의 부재'에 있다고 봤다.

* 추천 글 : '촛불정국'에 나타난 과학담론의 사용

위험을 말하면 과학과 정치는 자연스레 논의의 장에서 만나게 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는 과학만의, 혹은 정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 쪽은 과학을 내세워 국민들의 무지몽매함을 꼬집었고, 다른 한 쪽은 정치로 맞서면서 정부와 보수들의 비민주성을 비판했다. 답이 나오기 힘든 판이었다. 마치 진화론과 창조과학의 끝없는 논쟁처럼 말이다. 출발점만 다른 게 아니라 양 눈가를 가리고 뛰는 경주마였으니까. 결국 지친 촛불은 점점 사그라져 갔고, 승리감에 도취된 정권은 무식해졌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른만큼 내 편과 네 편을 두고 세운 각은 더 날카로워졌다. 전직 대통령이 하늘로 몸을 던졌고, 46명의 젊은 장병들이 이유도 모른 채 깊고 푸른 바다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파헤쳐진 강과 습지를 새들도, 꽃도 떠나고 있다. 민주주의,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70-80년대 팔뚝질을 하고 짱돌을 던지며 외쳤을 법한 구호들이 되돌아 오고 있다. 각이 더 날카로워진만큼 싸움은 더 거칠어졌고 세상은 복잡하지만 단순해졌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촛불집회 2주년을 맞이하면서  언론이 쏟아낸 특집 기사는, 그 거칠고 단순하며 복잡한 싸움의 현재형을 보여준다. <조선일보>는 촛불소녀, 우희종 교수, 김성훈 전 장관 등의 인터뷰를 짜깁기해 또 하나의 작품을 선보였다. 기자가 아니라 '소설가'라며, 모두 신춘문예출신 아니냐며 사람들은 조소를 날렸고 오마이뉴스와 한겨레, 경향을 통해 이를 반박하는 보도들이 이어졌다. 


관련기사 "꼭두각시?  입맛에 맞게 내 말 왜곡" <조선> '촛불소녀 인터뷰'의 진실은?>
            
올해 햄버거 먹으며 미국여행? "<조선> 작문실력은 명불허전"


조선일보의 기사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건 잘못된 기사고, 과잉 편집과 주관적 저널리즘의 전형이다. 지난달 조선일보 견학 당시 부국장과 편집국장 모두 "우리는 가장 열심히 팩트파인딩을 하는 신문"이라며 자신있게 말했다. 정확하고 공정한 보도를 추구하기 때문에, "조선일보 기자는 맨 마지막까지 현장에 남아 있다"는 속설도 있다며 단언했다. 그러나 "몇날 며칠 피와 땀을 쏟아가며 찾은 귀한 팩트들"을 배치하는 데 있어 정도(正道)와 절제가 없었다. 조선일보가 비판받아야 할 마땅한 이유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惡인가? 트위터나 기사 댓글 등을 접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찌라시다, 조선일보 기자들은 분명 국문과만 있을 거다라는 인신공격들만 있다. 마케터님의 지적대로 우리는 조선일보의 프레임에 말리고 있다. "그건 가짜야" 이상의 무언가가 없다. 항상 이런 식이다. 조선일보는 정도에 어긋난 신문, 보수꼴통인 신문이고 제멋대로 기사를 휘갈겨 대는, 그래서 언론이라고 인정할 가치조차 없는 신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5월 11일 조선일보 촛불소녀 인터뷰ⓒ조선PDF


적(敵)이 없는 싸움은 없다. 하지만 이건 목숨 걸고 다투는 전쟁이 아니다. 적을 완전히 제거해야 하는 성격의 것이 못 된다. 설령 제거를 꿈꾼다 해도, 그게 답이 될 수 없다. 조선일보가 사라지면, 지역주의와 학벌주의, 언론과 자본의 결탁, 금권정치, 승자독식과 무한경쟁, 복권되지 못한 역사 등 수많은 한국 사회의 병폐들이 단칼에 정리되는가. 조선일보만 아니라면 되는가. 그게 전부인가. 조선일보 기자들의 '썩어빠진 정신머리'를 고치면, 말도 안되는 '작문' 보도를 멈출 수 있는가.


같은 글, 치이링님의 댓글대로 조선일보는 늘 중요한 싸움에서 이겼다. 그때마다 진 쪽은 '너희는 언론이 아니다, 찌라시밖에 안 되는 좇선일보'라며 비난하고 무시하며, 한편으론  '민주주의와 저널리즘의 위기'를 외쳤다. 2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답이 없다. 이길 수 없는 판이다. 바른 말이 늘 매력적으로 들리는 건 아니다. 또 '올바름'의 잣대는 언제나 치우쳐 있다. 불확실한 세상에 칼로 자른 듯 정확하고 공정한 옳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일보를 말하고, MB를 말하고, 촛불을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옳다'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코 끝이 없을 이 싸움판에서 지금껏 진보가 이긴 경우는 손에 꼽힌다. 지난 10년과 2004년, 2008년의 촛불 정도다. 그 불완전한 승리마저 담양쑥부쟁이같은 '멸종위기종'이 되어가는 중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