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펜 끝을 벼리다

그저 변화를 믿을 뿐



"…비유하자면 한국의 저널리즘은 그동안 어려웠던 집의 맏아들같아서 도맡아 집안을 꾸려오느라 온갖 고생을 해오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와서 보니 공은 차치하고 흠만 남아 시비의 대상이 된 형국이다. 국권회복, 반독재, 근대화, 민주화 등의 고상한 명분에 눌려 자기의 본모습은 내놓을 기회가 드물었다는 것이다. 지극히 세속적인 저널리즘이 세속적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항상 칸드적인 정언명령과 의무론에 짓눌려왔다는 것이다."

-자유언론과 민주주의('민주화 이후의 한국 언론 p88), 임상원


지난 토요일 필기시험의 주제는 '언론의 윤리적 딜레마와 사회적 책임론'이었다. 최근 경향신문 사건도 있고, 바로 전날 술자리에서 이와 관련된 썰을 좀 풀기도 해서 그닥 힘들이지 않고 글을 썼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자본과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할 언론이 지배받고 있다'는 딜레마적 상황에 대해서 말이다. 결론 역시 뻔하긴 마찬가지. 단순히 말하자면 '저널리즘은 민주주의에 필수적이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제 나는 이런 생각을 반성하게 됐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꼼꼼이 따져보면 100% 맞는 명제도 아니다.

구입 후 몇 년을 묵어뒀던(;;;) 『민주화 이후의 한국 언론』에 실린 첫번째 글 '자유언론과 민주주의'를 읽었다. 이 글은 '과연 저널리즘은 민주주의에 필수적인가'를 묻는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명제를 의심한다. 임상원은 듀이와 리프먼의 유명한 논쟁을 설명하며, 저널리즘은 민주주의에 '필요'하지만 '필수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저널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긍정한 듀이 역시 강조한 것은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이었지 저널리즘은 아니다. 저널리즘이 최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는 일'이란 리프먼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버마스의 '공론장'이란 개념을 접하기 전부터 나는 막연히 '저널리즘은 민주주의를 수호하며, 그것이 잘 작동되게 하는 필수요소'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말과 글이 힘을 갖는 사회, 곧 저널리즘의 다양성이 인정받는 사회가 보다 나은 민주사회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임상원은, 허버트 갠스가 한 말을 빌어 "'오늘날의 저널리즘'이 딜레마에 빠져 있는 민주주의를 구원하기는 역부족"이라는 이야기로 나아간다.



"유감이지만 뉴스 그것만으로는 저널리스트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스스로 희망하는 것만큼 많은 것을 할 수 없다.…저널리스트들도 그들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힘을 못 갖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영위하는 데 뉴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전쟁이나 9·11 사태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뉴스를 뒤쫓지 않는다."

-허버트 갠즈


사실 저널리즘이 민주주의에 필수적이라고 말할 때, 여기서 민주주의란 '숙의민주주의(deliberate democracy)'를 가리킨다. 숙의민주주주의는 시민들이나 그들의 대표들이 공공의 문제에 대해 의견이 불일치할 때(갈등 상태), 그들이 상호 수용가능한 결정에 이를 때까지 (합의 도출) 이성적인 숙의를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숙의민주주의는 '토론으로 합의를 낳을 수 있다'고 전제한다. 그 대표적인 이론가가 존 스튜어트 밀과 위르겐 하버마스다. 밀은 "인간은 무오류의 존재가 아니다"란 말로 토론의 자유를 논증했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이란 개념을 써가며 토론을 통해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 숙의 민주주의를 비판한 대표적인 학자가 샹탈 무페다. '정치적인 것의 귀환'이라는, 인상적인 책 제목 때문에 기억하고 있던 사람인데 이번엔 '불가지론적 민주주의'란, 인상적인 이론 때문에 기억하게 될 것 같다. 무페는 숙의민주주의가 합리주의란 틀에 너무 의존하고 있다며, 하버마스의 숙의문제는 정치적 문제를 이성과 합리적 토론의 것으로 보기 때문에 여기에 전제돼 있는 언어나 기호의 한계를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이론을 빌려, 무페는 합의란 커뮤니케이션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결과라고 한다. 합의를 이루려면 제일 먼저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곧 삶의 양식에 대한 합의란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을 몰라서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다행히 뒤에 설명이 이어졌다. "서로 합의불가능한 두 개의 원리들이 만나는 경우, 그들은 한쪽을 바보나 혹은 이교도라고 선언할 것이다. 그런 경우 숙의가 아니라 '투쟁'만이 남게 된다."

무페가 하버마스를 비판하는 또 다른 근거는, 아무런 억압이 없는 '자유로운 커뮤니케이션 상황'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때 등장하는 것은 라캉의 이론. 이것도 어렵다, 나중에 찾아봐야겠다 ㅠㅠ 암튼 무페는 "의식의 세계는 무의식의 지배를 받고, 우리가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 사용하는 시니피에(signifier)들 역시 주된 것과 그 지배를 받는 다수의 종적인 시니피에들이 있다"며 그런 의미에서 커뮤니케이션 상황은 모두 '권위적'이라고 지적한다. 결국 문제는 '이상적인 언론 무대'가 형성되는 것은 존재론적인 장애가 있기 때문에, '공통 관심사에 대한 자유롭고 억제되지 않은 숙고'란 개념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사회라고 해서 완전한 조화와 투명성이란 꿈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며, 민주정치의 목표는 '적대적 관계'가 아닌 '대결자적 관계'다. 무페는 대결자들 간의 '숙의'가 아니라 '갈등'을 통해 합의가 이뤄지기 때문에 현대 민주주의는 '반대자를 위한 공간'과 '반대가 제도적으로 표출될 수 있는 장치'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재작년 촛불 시위 때 방한한 콘돌리자 라이스가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러운 것"이라고 했던 게 이런 뜻이었을까?

임상원은 결국 '저널리즘의 숙의민주주의적 기능'은 하나의 레토릭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저널리즘은 민주주의에 필수적"이라며 저널리즘의 '정당성'에 집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저널리즘이 민주주의에 필수적이라면, 저널리즘 뉴스의 왜곡과 편견을 제거하면 민주주의 위기는 물론 저널리즘의 위기도 극복할 수 있고 또 저널리즘 매체가 공론장의 성격을 갖추면 민주주의를 위한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의 모든 문제점은 저널리즘에서 비롯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문제는 저널리즘"이 아니라 "문제는 정치"다. 저널리즘은 단지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사회는 사건들에 대한 단순한 정보에 의해 통치되는 것이 아니다"는 리프먼의 말처럼.

'지사(志士)형 저널리즘'은 한국 저널리즘의 오랜 모습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저널리즘의 힘을 과대평가해 온 것 같다. 현 정부 들어 가속화되고 있는 정치권력의 언론 장악, 그리고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온 자본의 언론 장악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언론 장악의 정당성을 떠나), 저널리즘의 민주주의적 기능을 지나치게 믿었던 탓이 아닐까? 또 그 믿음이 여전하기 때문에, 권력과 자본의 언론 장악을 비판하는 논리 속에 '저널리즘의 민주주의적 기능'이라는 추상적 근거만 보이는 게 아닐까? 답을 알 수 없을 뿐더러, 없는 문제다. 한편으론 그렇다고 해서 저널리즘과 민주주의의 상관 관계를 아예 부정할 수도 없다. '다양성'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또 그것이 민주주의의 힘이자 발전 동력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문의 힘은 지금까지 민주주의 이론에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약하고, 민주주의자들이 신문의 본래적인 속성이라고 생각하는 '자발적으로 진실을 전달하는 역할'을 감당할 충분한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리프먼의 지적은 새겨들어야 할 것 같다. 저널리즘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추상적으로만 논해오는 일은, 결국 사람들에게 진정성있게 다가가지 못할 듯하다. 2008~2009년 미디어법 문제와 민주주의를 엮어 프레임을 짠 경향과 한겨레를 보며 어딘가 모르게 답답했던 이유다. 물론 "저널리즘은 정치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도와줄 수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게 비겁하다는 감도 있지만, '뉴스 제공'이라는 본연의 기능 이상의 것을 저널리즘이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저널리즘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고 본다. 다만 '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다는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 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