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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마음에 남아/보고 듣고 읽고 쓰다

뻔한 답을 말하지만 - <그을린 사랑> 재일학자 서경식 독일 드레스덴 주립미술관에서 오토 딕스의 '전쟁'을 관람하던 주민에게 그림의 인상을 묻는다. 그는 "어머니에게 전쟁 이야기를 들어보면 현실은 이 그림보다 더 가혹했던 것 같다"고 답한다. 하지만 직접 보지 못하고, 겪지 못한 자라면 그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전쟁이 얼마나 인간을 파괴하고,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지를 말이다. 상상 이상의 고통과 충격. 사실 전쟁의 내용과 결과는 늘 그랬다. 영화 은 마치 바다는 늘 상상보다 큰 것처럼, 전쟁 또한 생각 이상의 비극을 낳음을 보여준다. 투박하지만, '헉'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날 것 그대로를. 어머니가 죽었다. 유언을 남겼다. 아버지와 또 다른 형제를 찾아서 편지를 전달하라고, 마지막 당부를 지키지 못한다면 자신을 나체로 엎드린 채 .. 더보기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어머니의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다. 어머니는 내게 우는 여자도, 화장하는 여자도, 순종하는 여자도 아닌 칼을 쥔 여자였다. 건강하고 아름답지만 정장을 입고도 어묵을 우적우적 먹는. 그러면서도 자신이 음식을 우적우적 씹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촌부. 어머니는 칼 하나를 25년 넘게 써왔다. 얼추 내 나이와 비슷한 세월이다. 썰고, 가르고, 다지는 동안 칼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씹고, 삼키고, 우물거리는 동안 내 창자와 내 간, 심장과 콩팥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나는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나를 건드린다.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기관들.. 더보기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이것저것 검색하다 우연히 들은 노래. 이 노래를 저토록 행복하게 부르던 두 사람은 실제로 결혼했다가 8개월 만에 헤어졌다는 슬픈 뒷이야기는 접어두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말하고, 누군가를 축복할 때 참 잘 어울리는 노래 같다. 더보기
진정한 화가는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테오에게 사람들은 기술을 형식의 문제로만 생각한다. 그래서 부적절하고 공허한 용어를 마음대로 지껄인다. 그냥 내버려두자. 진정한 화가는 양심의 인도를 받는다. 화가의 영혼과 지성이 붓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붓이 그의 영혼과 지성을 위해 존재한다. 진정한 화가는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캔버스가 그를 두려워한다. 1885년 나이를 먹을 수록 입버릇처럼 말하게 된다. 시간이 너무 잘 간다고. 한겨레 최종합격자 명단이 떴다. 해마다 그 자리에 내 이름이 박혔으면 하고 꿈꿔왔는데, 마음이 쓰라리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담담하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없겠냐만은, 더 이상 쉬이 흔들리고 싶지 않다. 실패든 성공이든 주어진 상황이 나를 옭아매거나 들뜨게하거나 낙담하지 않게 중심을 잡고 있는.. 더보기
'다름'에 관한 잡설 하나 2009년 2월 25일 교정을 나선 후로 과학도의 길은 깔끔히 접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로부터 1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 포항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돌아오던 그날부터. 그럼에도 여전히 관심이 계속 가는 분야가 있다. 하나는 백신, 또 하나는 돌연변이. 사실 이 두 개는 맞닿아 있다. 꾸준한 백신연구가 필요한 이유 중 하나는 생태계에서 끊임없이 돌연변이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화제가 된 '슈퍼 박테리아'가 좋은 예다. 말이 '슈퍼'지 결국 돌연변이다. 거듭되는 변이과정으로 현존하는 항생제에 내성(resistance)를 갖게 된 미생물일 뿐이다. 달리 말해 '진화'한 것이다. 인류가 지금의 모습, 그리고 문명과 기술을 누리고 있는 이유도 사실 '변이' 과정에서 거둔 결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더보기
기억해야 할 것들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사랑" 돌아온 가인(歌人)은 호랑이처럼 포효했다. 이 세상에 전쟁이 아닌 것이 어디 사랑뿐이랴. 세상이, 일상이 전쟁이다. 담담히 이야기하는 말이다. 하지만 말이 아니라, 몸으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가며 전쟁을 겪는 사람들도 있다. '함께 살자'며 77일간 공장 안에서 농성했던 쌍용차 노동자들이 그랬다. 그 전쟁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을 봤다. 그들의 전쟁은 곧 우리의 전쟁이라는 말은 너무 많아서, 더는 외우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다. 오히려 이제 새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날 만난 사람들과 그들의 말이다. 이창근 민주노총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기획실장 - 왜 싸웠는가. 많은 문제가 있겠지만 첫 번째는 억울함과 분노였다.. 더보기
파란 우비와 한 남자 파란 우비를 입고 서 있었다. 비 오는 오후 아파트단지 입구는 한적했다. "안녕하세요"라며 수없이 허리를 숙여도 사람들은 무반응이었다. 두 세시간쯤 지났을까? 처음으로 '반가운 한 마디'를 건네받았다. 핸들을 잡지 않은 다른 손을 번쩍 들며 "파이팅"이라고 외쳤다. SM7를 몰고 있는 아주머니였다. SM시리즈는 3, 5, 7 순으로 고유번호가 붙는다. 가장 크고 비싼 게 SM7이다. 연분홍 자켓을 곱게 입은 할머니가 "고생한다"며 내 손을 잡았다. "아휴, 손 언 것 봐" 40년 넘게 한나라당만 찍었다며 지나가는 어르신도 있었다. 26일 분당에서 보낸 오후였다. 흔들리는 지하철 속에서 을 읽는다. 도서관에서 처음 본 순간, 제목 때문에 눈을 떼기 힘들었다. 그냥 한 노동자 이야기다. 스카핑 노동자로 집채.. 더보기
조지 오웰, '교수형' 중에서 ...소장은 지팡이를 뻗어 시신의 맨살을 찔러보았다. 시신이 슬쩍 흔들렸다. "'제대로' 됐다." 소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교수대 밖으로 나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시무룩한 기색이 어느새 걷혀 있었다. 그는 손목시계를 흘끗 바라보았다. "8시 8분. 오늘 아침에 할 건 다했다. 휴우." 간수들은 총에서 칼을 빼내고는 행진을 했다. 개는 차분해져서 자신이 잘못한 걸 의식했는지 그들 뒤를 슬그머니 따라갔다. 우리는 교수대가 있는 뜰을 벗어나 사형수 감방들 앞을 지나 형무소 중앙 마당으로 갔다. 재소자들은 곤봉 찬 간수들의 명령하에 벌써 아침 끼니를 타고 있었다. 양철 그릇을 하나씩 들고 줄줄이 앉아 있는 그들 사이로, 들통을 든 간수 둘이 지나가며 밥을 퍼주고 있었다. 제법 가정적이고 명랑해 보이는 광경이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