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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마음에 남아/보고 듣고 읽고 쓰다

파란 우비와 한 남자

파란 우비를 입고 서 있었다. 비 오는 오후 아파트단지 입구는 한적했다. "안녕하세요"라며 수없이 허리를 숙여도 사람들은 무반응이었다. 두 세시간쯤 지났을까? 처음으로 '반가운 한 마디'를 건네받았다. 핸들을 잡지 않은 다른 손을 번쩍 들며 "파이팅"이라고 외쳤다. SM7를 몰고 있는 아주머니였다. SM시리즈는 3, 5, 7 순으로 고유번호가 붙는다. 가장 크고 비싼 게 SM7이다. 연분홍 자켓을 곱게 입은 할머니가 "고생한다"며 내 손을 잡았다. "아휴, 손 언 것 봐" 40년 넘게 한나라당만 찍었다며 지나가는 어르신도 있었다. 26일 분당에서 보낸 오후였다.

흔들리는 지하철 속에서 <인간의 꿈>을 읽는다. 도서관에서 처음 본 순간, 제목 때문에 눈을 떼기 힘들었다. 그냥 한 노동자 이야기다. 스카핑 노동자로 집채만한 보일러를 만지던, 누군가의 아버지며 남편이고 아들이었던, 호루라기를 불며 공장 안을 신나게 누비던. 2003년 1월 9일 그는 사측의 노조탄압에 항의하며 스스로 불을 붙였다. 마른 몸은 순식간에 재가 됐다. 주인 잃은 신발 한 짝만 덩그러니 남았다.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씨 이야기다. 양복을 잘 차려입고  ○○카드, ○○은행, ○○증권에 출근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평생 기름냄새에 절어 살다가 숨진 그의 이야기를 읽는다. 반듯하게 정돈된 도로와 조경을 자랑하는 신도시에서 푸른색 우비를 입고 인사하면서, 가방 속에 든 그 책을 떠올린다.

천당 아래 분당이 있다면, 그 외에 다른 곳은 어디인가. 성실하고 평범하게 큰 욕심 없이 살아가는 단단한 사람들을 세상은 왜 이리 가볍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하게 만드나하고 묻는다. 어쩌면 권리말고 의무를 먼저 배우는 사회에선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생존해야 한다고 강변하는 곳에선 자연스러운 일인 것도 같다. 더 많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할 수록 한숨이 깊어진다. 무엇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 희망을 말할 수 있을지 짐작이 어렵다. 무엇이 인간인지,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지. 머릿속이 복잡하다. 또 한숨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