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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마음에 남아/보고 듣고 읽고 쓰다

'다름'에 관한 잡설 하나

2009년 2월 25일 교정을 나선 후로 과학도의 길은 깔끔히 접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로부터 1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 포항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돌아오던 그날부터. 그럼에도 여전히 관심이 계속 가는 분야가 있다. 하나는 백신, 또 하나는 돌연변이. 사실 이 두 개는 맞닿아 있다. 꾸준한 백신연구가 필요한 이유 중 하나는 생태계에서 끊임없이 돌연변이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화제가 된 '슈퍼 박테리아'가 좋은 예다. 말이 '슈퍼'지 결국 돌연변이다. 거듭되는 변이과정으로 현존하는 항생제에 내성(resistance)를 갖게 된 미생물일 뿐이다. 달리 말해 '진화'한 것이다.

인류가 지금의 모습, 그리고 문명과 기술을 누리고 있는 이유도 사실 '변이' 과정에서 거둔 결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진화의 끝은 어디일까? 또 우리는 겹겹이 쌓여가는 진화의 두께 속에서 얼마나 행복할 수 있고, 또 '인간다울' 수 있는 걸까? 극장에서 본 '엑스맨 : 퍼스트 클래스'를 시작으로 요 며칠 '엑스맨 시리즈'를 연달아 본 후 남은 질문이다.


인류와 공존하려는 찰스(프로페서 X), 인류를 지배하려는 에릭(매그니토), 그리고 끝없는 인류와 돌연변이, 돌연변이와 돌연변이의 싸움. 살아남기 위해 계속 날을 세우고 싸우고 죽인다. 결국 이긴 자는 살아남는다. 하지만 그 메시지에서 '희망'을 찾기 어렵다. 엑스맨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제는 '희망'이 아니다. 변화가 우리에게 새로운 시대의 저평을 보여줄 것이란 기대감도 아니다. 누구나 갖고 있는 '두려움'이다. '나, 우리와 다른 무엇'에 대한 두려움. 길고 긴 싸움의 시작은 단순했다. 그리고 보편적인 것이었다.



'다름'은 사회의 결을 좀 더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다양성이 생태계를 유지하는 중요한 원리임은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다름'을 대하는 시선은 부정적이다. 정도가 다를 뿐 나이, 성별, 피부색, 종교, 지역, 학력 등 수많은 '차이'를 우리는 짐짓 거부한다. 말과 행동으로 구별짓는다. 강자든 약자든 누구나 마찬가지다. '다름'에 불편함을 느끼는 일이 어쩌면 인간다운 것 중 하나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중요한 점은 불편함을 느끼는 데서 끝나지 않을 때 비극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싫어, 불편해'라고 해도 그 감정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상대방의 제거 혹은 파괴를 향하지 않는다면 괜찮다. 문제는 '안 괜찮은' 상황이 비일비재한 우리 현실이고, 영화 속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 엑스맨들만이 아니라 김진숙, 홍대 청소노동자, 한양대 '성의 이해' 수업 등등 수많은 다름들이 수많은 불편함으로 그래서 반목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바라 볼 수 있는 사회는 너무 큰 꿈일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보면, 너무 쉽게 '개인의 책임'을 말하는 모습들을 보면 우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