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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마음에 남아/밑줄을 긋다

위험 커뮤니케이션의 정치학 위험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위험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과 그로부터 이윤을 얻은 사람들 사이에 적대감이 발생한다. 또한 위험과 관련된 지식의 사회적•경제적 중요성이 함께 증대되며, 위험을 설명하는 과학적 연구 내용을 구성하고 퍼뜨리는 대중매체의 권력이 커 간다. 이런 점에서 위험사회는 과학과 미디어를 바탕으로 한 정보화 사회이기도 하다. 수용 가능한 수준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환자나 희생자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수가 늘거나 줄어든다. 원인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기업들은 비난의 포화를 맞게 되며, 기성 정치인들은 사고와 피해의 원인이 체제가 아니라 개인에게 있다고 책임을 떠넘김으로써 압력을 줄이려고 애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시장에 대한 참여 확대 기회로 활용하는데, 이때 과학자들은 양쪽 .. 더보기
이청준, <벌레이야기> 중에서 "그래요.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보다는 이미 내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된 때문이었어요. 집사님 말씀대로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나는 새삼스레 그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어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 있어요? 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내게서 그걸 빼앗아가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들 용서합니까." 아내는 이미 스스로 용서를 결심하고 그를 찾아갔을 만큼의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만큼은 스스로도 믿음과 사랑의 계율을 익히고 있었다. 그 참뜻과 가치를 깨닫고 있.. 더보기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중에서 - 그가 숨진 지 30년, 차마 부끄러워 이름을 부르지 못했던 전태일. 아버지가 당신의 친구들처럼 독립운동에 투신하지 못한 것에 원죄의식을 갖고 있듯이 나도 전태일에게 원죄의식을 갖고 있다. 그는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의 한 거리에서 분신자살했다. 그 가을에 나는 한창 잘 나가던 젊음을 보내고 있었다. 낮에는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고 밤에는 생맥주집에서 기고만장해서 기염을 토해대고 있었다. 중산층 가정에서 인생의 양지쪽은 당연히 내 차지라는 생각만 하고 그늘에 있는 사람의 생존 문제는 그들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청계천에서 배고픔과 졸음으로 파리하게 죽어가던 10대의 어린 동생들과 자신과 동료들의 생존권을 위해 스스로 산화했을 때, 대학생 친구가 하나만 있었다면 했던 탄식과 공책에 빼곡히 쓴.. 더보기
리영희, <역정> 중에서 - 하루 세 끼의 식사는 보리 6할, 쌀 4할인 밥 한 그릇과 콩나물국이었다. 방어선이 주머니처럼 좁아진 부산 일대에서 어떻게 그렇게 연일 콩나물이 생산되는지 의아스러울 만큼 끼니 때마다 콩나물국이 나왔다. 밥은 그릇에 차지 않고, 국은 몇 오라기의 콩나물을 소금물에 띄운 것으로, 국물에는 아무 색깔도 없었다. 적어도 1950년 8월 당시의 이 나라에서는 최고의 '지식인'이라 할 사람들 사이에서 밥그릇 소리만 나면 싸움이 벌어졌다. 보리밥의 표면과 밥그릇 언저리까지의 거리를 현미경적 정밀성으로 측량하는 눈빛은 살벌했다. 바다 같은 물 위에 뜬 콩나물 오라기 수를 순간적으로 계량한 손들이 쟁탈전을 벌이곤 했다. 교실 마룻바닥에 보리밥 그릇이 뒹굴고, 그나마 그것으로라도 배를 채워야 할 콩나물 국물이 흥건했.. 더보기
프리모 레비, <지금이 아니면 언제> 중에서 (103쪽) "또 많은 젊은이들도 왔다가 내 허락과 무관하게 떠나갔네. 이 초라한 엉터리 공동체에서 기아와 공포 속에 떨며 무기력하게 살아가느니, 차라리 유격대에 가담해 화끈하게 싸우다 죽는 게 훨씬 뜻 깊을테니까. 역설적으로 좌절과 절망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얼마든지 죽을 수 있는 게 젊은이들의 특권이 아닌가. 그만큼 무서운 게 절망이라네. 죽음에 이르는 병이지." -빨치산 공동체 지도자 도브 원장의 말 (133쪽) 목숨을 내놓은 채 한바탕 격전을 치르며 사선을 넘어갔다 온 뒤라서 그런지, 모두 영혼과 사지가 마비된 듯 넋을 잃은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고, 도피와 추격도 끝나지 않을 것이고, 시베리아 눈보라도 계속 몰아칠 .. 더보기
찬란한 예감 새날이 밝았다. 오빠가 오래간만에 잘 잤노라고 기지개를 폈다. 나는 앞으로 후퇴한 정부가 수복됐을 때 생각만 하고, 당장 당면한 또 바뀐 세상엔 어떻게 대처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선 대책 없는 식구들이 답답하고 짐스러웠다. 오빠를 손수레에서 내려놨다고 해서 내 짐이 가벼워진 건 아니었다. 나는 바뀐 세상의 눈치를 보려고 조심스럽게 문밖으로 나갔다. 지대가 높아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혁명가들을 해방시키고 숙부를 사형시킨 형무소도 곧장 바라다보였다. 천지에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마치 차고 푸른 비수가 등골을 살짝 긋는 것처럼 소름이 확 끼쳤다. 그건 천지에 사람 없음에 대한 공포감이었고 세상에 나서 처음 느껴보는 새로운 느낌이었다. 독립문까지 환히 보이는 한길에도 골목길에도 집집마다에도 .. 더보기
김훈, <개> 중에서 엄마의 혀는 길고 따스했어. 엄마는 맏형의 똥구멍이며 주둥이, 귓구멍 속까지 샅샅이 핥아주었어. 비쩍 말라서 기지도 못하는 맏형은 가랑이를 벌려서 엄마의 혀를 받으면서 가느다란 숨을 겨우 몰아쉬었지. 마당에서 햇빛이 끓는 봄날, 엄마는 맏형을 깨끗이 씻겼어. 눈곱과 오줌 싼 자리까지 핥아내고 잔털을 빗질하듯 혀로 쓰다듬어서 가지런히 뉘었지. 그러고 나서 엄마는 젖을 빨던 우리들을 밀쳐내고 일어섰어. 엄마는 맏형의 덜미를 물고 마당으로 나갔어. 엄마는 우물가에 맏형을 내려놓았어. 눈을 못 뜬 맏형은 봄볕이 힘들어 버둥거렸지 거기서 엄마는 맏형을 삼켰어. 엄마는 맏형을 세상에 내보낸 것이 잘못되었거나 너무 일렀다고 생각했던 거지. 앞다리가 부러진 채 태어난 맏형이 개의 한 세상을 몸으로 비비면서 살아내야 한.. 더보기
강만길, 『역사가의 시간』 중에서 (152~154쪽) 민족해방운동전선의 좌우익전선을 막론하고 해방과 함께 반드시 이루어야 할 혁명의 내용을 요약하면, 그것은 해방 직전 츙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내놓은 건국강령에 잘 나탄 듯이 토지혁명, 기업혁명, 인간혁명 등 세가지였다. 우선 토지혁명은 전통사회부터 재래지주들의 소유로 되어온 토지와 일제강점기에 새로 생긴 신흥지주들의 토지를 경작농민에게 무상으로 돌려주는 혁명이었고, 기업혁명은 구한말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걸쳐 조성된 철도‧은행‧대기업 등과 일본인 및 친일 반민족세력의 기업들을 몰수해서 국가소유로 하는 혁명이었다. 이러한 토지혁명과 기업혁명이 당시 제대로 완수되기만 했다면 신생 국민주권주의 국가의 경제적 기반도 확보됐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3대혁명 중 가장 중요한 인간혁명은, 일제강점기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