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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마음에 남아/밑줄을 긋다

위험 커뮤니케이션의 정치학

위험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위험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과 그로부터 이윤을 얻은 사람들 사이에 적대감이 발생한다. 또한 위험과 관련된 지식의 사회적•경제적 중요성이 함께 증대되며, 위험을 설명하는 과학적 연구 내용을 구성하고 퍼뜨리는 대중매체의 권력이 커 간다. 이런 점에서 위험사회는 과학과 미디어를 바탕으로 한 정보화 사회이기도 하다.

수용 가능한 수준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환자나 희생자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수가 늘거나 줄어든다. 원인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기업들은 비난의 포화를 맞게 되며, 기성 정치인들은 사고와 피해의 원인이 체제가 아니라 개인에게 있다고 책임을 떠넘김으로써 압력을 줄이려고 애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시장에 대한 참여 확대 기회로 활용하는데, 이때 과학자들은 양쪽 편에 동시에 속하기도 한다.

현재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위험사회로 접어드는 이유는 인간이 자연을 변형시킬 가능성이 과거보다 훨씬 더 커졌기 때문이다. 즉 과거에는 인류에게 미쳤던 위험이 대개 자연적인 위해(natural hazard)에 그쳤지만, 미래에는 내분비계 교란 물질의 범람, 백신의 부작용 등 인간 자신이 만들어 내는 위험이 더욱 많아질 것이다.

생태계와 건강에 미치는 다양한 영향들은 사람들이 바라는 만큼 정당화되고 최소화될 수 있으며, 반대로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는 형태로 극대화될 수도 있다. 이런 위험요소들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법적인 차원에서 다양하게 영향을 미친다. 결국 울리히 벡은 근대화 과정에서 위해의 원인을 제거하는 문제 자체가 정치 문제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생산물 계획, 생산 과정, 에너지의 종류, 폐기물 처리와 같은 산업 관리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들은 이제 더 이상 공장 관리의 문제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 문제들은 정부의 정책 입안 과정에서 주요 쟁점으로 등장하며, 유권자들에게는 실업 문제와 같은 비중으로 다가갈 수도 있다. 위협이 커질수록 긴급 사태에 대한 개입주의적 정책이 부상하고, 위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개입 가능성과 권위가 확대된다. 마침내 위험은 권력이 부분적으로 재분배되는 방식으로 정상 상태가 되면서 제도적인 형식을 취하게 된다.

과학 기술 지식의 단순한 확대만으로는 위험사회에서 나타나는 많은 위험을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위험은 이제 정치적인 문제가 되었고, 따라서 위험과 관련된 소통은 정당성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한스 페터 페터스는 이제 위험 소통(Risk Communication) 문제는 합리성(rationality)의 문제에서 정당성(legitimacy)의 문제로 옮겨 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임경순, <과학을 성찰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