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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마음에 남아/밑줄을 긋다

리영희, <역정> 중에서

 

 



- 하루 세 끼의 식사는 보리 6할, 쌀 4할인 밥 한 그릇과 콩나물국이었다. 방어선이 주머니처럼 좁아진 부산 일대에서 어떻게 그렇게 연일 콩나물이 생산되는지 의아스러울 만큼 끼니 때마다 콩나물국이 나왔다. 밥은 그릇에 차지 않고, 국은 몇 오라기의 콩나물을 소금물에 띄운 것으로, 국물에는 아무 색깔도 없었다. 적어도 1950년 8월 당시의 이 나라에서는 최고의 '지식인'이라 할 사람들 사이에서 밥그릇 소리만 나면 싸움이 벌어졌다. 보리밥의 표면과 밥그릇 언저리까지의 거리를 현미경적 정밀성으로 측량하는 눈빛은 살벌했다. 바다 같은 물 위에 뜬 콩나물 오라기 수를 순간적으로 계량한 손들이 쟁탈전을 벌이곤 했다. 교실 마룻바닥에 보리밥 그릇이 뒹굴고, 그나마 그것으로라도 배를 채워야 할 콩나물 국물이 흥건했다. 끼니 때마다 교실에서 거친 욕설이 오가고, 주먹질이 벌어지는 일도 자주 있었다. 교실 네 언저리에 삥 둘러앉아 자리에서 배식되어 오는 대로 잠자코 받아 먹는 데는 무한한 극기심과 수양이 필요했다. 내가 남보다 덜 설치는 편이었다면 그것은 다만 나의 투쟁적 자기보호본능이 약했다는 것과, 다행히도 체구가 작아 남들보다 덜 먹어도 물배가 찼다는 우연의 결과일 뿐이다. 지식, 지성, 교양, 염치 따위는 인간이 다만 네 발(足)로가 아니라 두 발로 걷는 동물이라는 겉치레에 지나지 않았다. 한 달 동안 이런 생활을 하다보니, 일제 때 중학교 한문시간에 김경탁 선생님에게서 배운 <관자(管子)>의 한 구절이 천고의 명언이고 진리임을 새삼 깨달았다. "의식(衣食)이 족해서 비로소 예절을 알고 곳간이 가득해서 비로소 영욕을 안다." 전쟁은 인간의 원조인 동물로 환원하는 계기였다.


- 어째서 이 나라에서는 인간 말살의 범죄가 '공비'나 '빨갱이'라는 한 마디로 이처럼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그 후부터 머리를 떠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나는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의 '잔인성'을 나무라는 데 동조하지 않게 되었다.

- "중학교 이상 다니던 사람은 손 들어봐!" 100여명 가운데서 손 셋이 올라왔다. "그래 고맙다. 잘들 가거라." 내가 그들과 대면한 시간과 장소와 상황은 그들에게는 인간 존재로서의 '한계상황'이었따. 산을 걸어 내려가기 시작하면 그 보충병들은 한계상황의 마지막 '한계선'을 넘는 것이다. 철학자들의 머리에서 이루어지는 관념으로서의 극한상황 따위가 아니라 인간적, 생물학적 존재가 끝날 것이 십중팔구 확실하고 구체적이며 너무도 명백한 한계선이다. 그 선을 넘는 그들에게 "죽지 말라"고 말하지 못했고, "잘 싸워라" 하지도 못했다. 그 어느 말도, 그들과 함께 당장에 그 한계선을 넘어서 행동을 같이 해야 할 필요가 없는 나로서는 안이한 위한으로 자신을 속이는 것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한계 상황을 넘는 장면에서는 모든 '말'이 공허한 것이 된다. 나는 말 대신 차라리 건빵봉지라도 줄 생각을 못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학교깨나 다닌 젊은이들은 다 어디 가고, 이 틀림없는 죽음의 계곡에는 못 배우고 가난하고 힘 없는 이 나라의 불쌍한 자식들만 보내지는가? 나라사랑은 힘 없는 자들만이 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