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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마음에 남아/밑줄을 긋다

강만길, 『역사가의 시간』 중에서


(152~154쪽)
 민족해방운동전선의 좌우익전선을 막론하고 해방과 함께 반드시 이루어야 할 혁명의 내용을 요약하면, 그것은 해방 직전 츙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내놓은 건국강령에 잘 나탄 듯이 토지혁명, 기업혁명, 인간혁명 등 세가지였다.

 우선 토지혁명은 전통사회부터 재래지주들의 소유로 되어온 토지와 일제강점기에 새로 생긴 신흥지주들의 토지를 경작농민에게 무상으로 돌려주는 혁명이었고, 기업혁명은 구한말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걸쳐 조성된 철도‧은행‧대기업 등과 일본인 및 친일 반민족세력의 기업들을 몰수해서 국가소유로 하는 혁명이었다. 이러한 토지혁명과 기업혁명이 당시 제대로 완수되기만 했다면 신생 국민주권주의 국가의 경제적 기반도 확보됐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3대혁명 중 가장 중요한 인간혁명은, 일제강점기에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하지는 못했을지언정 민족을 배반하고 행정과 군부 및 교육 등 각 부문에 걸쳐 침략자 편에 서서 그들의 식민통치를 위해 종사한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철저히 숙청하는 일이었다.

 이 세가지 혁명은 민족해방운동전선의 좌우익전선이 다함께 주장했던, 해방후의 민족국가 건설과정에서 반드시 이루어야 할 역사적 과제였다. 그러나 민족해방운동 말기에 좌우익연합전선체로 구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쪽이 아닌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이 해방후 남쪽의 통치권력으로 성립되면서 이 세가지 혁명은 결국 오롯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좌우익을 막론한 민족해방운동전선이 내세운 토지혁명의 방법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였지만, 이승만정권은 유상매입 유상분배를 강행했고, 기간산업과 일부 대기업은 국유화되었으나 나머지 대부분은 일제강점기 침략세력의 연고자, 즉 친일세력의 사적 소유로 됨으로써 기업혁명은 좌절되고 말았다.

 특히 가장 중요한 인간혁명은 완전히 실패했다. 미군정과 이승만정권 시기를 통해 친일반민족행위자가 그 반역사적‧반민족적 기득권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오히려 좌우익을 막론한 민족해방운동세력을 탄압하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이승만정권에 의해 ‘반민특위’가 해체된 결과였다.

 미군정과 이승만정권의 3대혁명 미수행 및 역행 때문에 이승만정권을 무너뜨린 4‧19는 민족해방운동전선이 이루지 못한 역사적 3대혁명을 반드시 이루어내야 하는, 그야말로 역사적 의미의 혁명 그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승마정권을 뒤엎은 4‧19 주동세력이 후속정권을 담당할 조건이 못되었고, 이승만정권 때처럼 민족해방운동전선이 실시해야 할 인간혁명의 대상자들이 대다수인 보수야당에 정권이 넘어가고 말았다.

 역사적으로 반드시 혁명이 되었어야 했던 8‧15와 4‧19가 옳은 의미의 혁명이 되지 모하고, 특히 인간혁명이 단행되지 못한 결과가 5‧16 군사쿠데타를 ‘성공’하게 한 것이기도 했다. 비록 문화민족사회라 해도 역사가 한번 제길을 제대로 나아가지 못할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4‧19와 5‧16의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6쪽) 역사학 연구자는 물론 과거의 사실을 다루게 마련이다. 그러나 역사학자는 과거만을 먹고사는 인간이 아니다. 그는 결코 진공상태 같은 현실에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일정한 역사적 과제를 떠안은, 현실적‧역사적 사회에 실재하면서 실천적으로 살고 있는 그야말로 역사적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