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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남은 몇 가지

"앞으로는 '공감'에 주목해야 한다" 독자가 원하는 것은 자신을 이입하여 공감할 수 있는 어떤 타자다. 그 공감은 때로 분노, 때로 웃음, 때로 울음이다. 공감은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이뤄지는 게 아니다. 공감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가 있다. 독자는 기자에게 “타자, 이웃, 세계와 공감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정돈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기자들은 지금까지 ‘정보’에 방점을 뒀다. 앞으로는 ‘공감’에 주목해야 한다. 공감을 위한 정보, 정보를 통한 공감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정답은 없다. 다만 나는 몰입하려 애썼다. 프레임을 고민할 때, 취재할 때, 기사를 쓸 때, 최대한 몰입했다. 나중에 돌아보면, 몰입한 만큼 독자들이 공감했다. - 안수찬 기자, '기자가 몰입한 만큼 독자가 공감한다' 중에서 더보기
고광헌 <한겨레> 사장 인터뷰 중 -뉴미디어시대의 언론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그야말로 빅뱅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야에서 비즈니스 모델은 크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면, 뉴미디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와 기술의 발전이 만나면서 오는 현상입니다. 과거에는 언론사만 정보를 수집을 할 수 있었고 정보독점을 할 수 있었죠. 하지만 IT 기술이 발달해 미디어와 결합하면서 언론사들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알려버리면 그만이니까요.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말도 있지만, 5명 혹은 1명이 미디어회사를 운영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신문사 10개, 방송사 3개였는데 지금은 비즈니스가 잘게 쪼개집니다. 그래서 옛날처럼 크게 매출을 일으킬 것이라는 데는 비관적입니다. 이 때문에 조중동은 .. 더보기
"우리는 여전히 이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제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과연 이 모바일 시대에 1만 3천 단어의 긴 기사가 읽힐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잡지를 제외하고 말이죠. 저를 기분 좋게 만들었던 것은 많은 독자들이 웹에서도 기사를 읽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을 띄울 수 있는 것이 웹이든 휴대전화 스크린이든 간에 1만 3천 단어의 기사를 읽을 수 있다면 그것이 이상적인 장치인가 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물론 저는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다. 기사가 흥미롭다면 사람들은 인터넷에서도 읽을 것입니다. 어쩌면 출력할 수도 있구요. 이런 현상은 심층보도와 이야기식 저널리즘이 살아 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줍니다. 또한 아이패드와 같은 새로운 플랫폼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요즘 관심거리인 아이패드는 긴 기.. 더보기
김주하 앵커의 트위터와 워싱턴 포스트의 내부 지침 [출처 http://deulpul.egloos.com/3198551] 방송 3사 예단보도로 시민들 불안 이번 초계함 사건에서도 언론은 기본 원칙을 무시한 여러 잘못을 저질렀다. 그 중 가장 심각한 잘못은, 뚜렷한 근거 없이 이런저런 소문과 추정을 사실인 양 내보낸 일이다. 특히 속보를 계속 내보냈던 방송 매체에서 이런 잘못이 두드러졌다. 분명한 근거나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북한의 공격으로 배가 가라앉은 것처럼 보도한 태도는 저널리즘의 기초를 완전히 무시한 것일 뿐 아니라, 일의 중대함을 고려해 볼 때,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위험한 줄타기를 시도했다고 비판해도 변명하기 어렵다. 설령 나중에 이 비극이 북한의 공격에 의해 발생했다고 판명나더라도, 사건 초기에 아무런 근거 .. 더보기
부산 여중생은 왜 목숨을 잃었나 지금은 관심이 김길태라는 '파렴치한 악인'에게 집중되고 있지만, 결국 이 사건의 피해자는 덕포동에 살고 있던 한 여중생이었다. 일부 언론은 여중생의 죽음에 호들갑을 떨 뿐, 정작 중요한 생전의 여중생에 주목하지 않는다. 이 여중생이 어떻게 살다가 변을 당했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다. 마치 미국범죄드라마처럼, 이 사건의 주인공은 김길태라는 잔인한 '사이코패스'와 이를 멋지게 요리하는 CSI와 프로파일러이다. 상상의 세계에서 펼쳐지던 것들이 실현되었다는 점에서 언론의 관객들은 어떤 가상의 드라마보다도 이번 사건에서 강렬한 박진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스펙터클을 넘어서서 우리는 질문해야한다. 그 여중생은 왜 집에 혼자 있었고, 그 동네는 왜 그토록 빈집들이 많았는지 말이다. 결국 재개발이라는 한국 사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