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펜 끝을 벼리다/박기자의 하루

[서초동일기] 20151127 내가 날렵했을 때

내 몸은 날렵했다. 어제 오후, 나는 이 과거형 문장을 다시 확인했다. 


서울고법 306호 법정에는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온 사람들이 가득했고, 비어있는 좌석은 없었다. 한 쪽 구석에 겨우 주저앉아 노트북을 펼쳤는데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마음먹었는데, 앞쪽으로 쏠린 몸의 중심을 잡기란 쉽지 않았다. 10여분 뒤 법원청사 2층 현관쪽에서 쪼그린 채 KTX 해고승무원노조 지부장의 말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음 먹은 대로 움직이는 몸'은 당분간은 과거형인데도, 최대한 용썼던 이유는 KTX 해고승무원들의 판결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이날 법원은 그들이 한국철도공사 소속임을 확인해달라며 제기한 소송의 사실상 마지막 판결을 내놨다. 원고 패소라는. 이미 몇 달 전 대법원이 같은 취지로 사건을 고법으로 돌려보냈기 때문에 다른 결론을 예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바랐을 뿐이었다.


ⓒ 유성호


직업상 기자들은 참담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 '지금 심경이 어떠냐'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뻔한 말 혹은 거친 말이 돌아올 가능성을 알면서도 묻는다. 오늘도 기자들 중 누군가 승무원들에게 '지금 심경이 어떠냐'고 물었다. 똑같은 물음을 입안에 머금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그 주인공이 내가 아닐 때 느끼는 감정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다행이라는 안도감, 왜 이래야하나 싶은 짜증 등등이 교차한다.


아무튼 질문은 나왔다. 9년간 싸우며 수없이 기자들 앞에 섰을 승무원들도 그 순간을 충분히 예상했으리라. 하지만 지부장은 멈칫했다. 짧은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끝까지 싸우겠다"는 뻔한 말이었지만, 단어 하나 하나에는 세월이, 감정이 묻어났다. 그것을 전달하기에는 내 언어가 빈곤했다. http://omn.kr/flr4


인터뷰를 마치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명함을 나눠주는 그를 여느 때처럼 '얼른 기사 쓰러가야지'란 생각만으로 돌아서기 난감했다. 언젠가 내 몸이 날렵했을 때, 옛 민주노총 건물 화장실에 쪼그려 발을 닦던 KTX 승무원들을 보며 '저들도 누군가의 귀한 딸일 텐데...'라는 생각에 먹먹했다. 어쩌면 오늘 내가 본 승무원들 중 하나가 바로 그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