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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박기자의 하루

[안국동 일기] 20150501 잔인한 오월의 밤


# 표적을 찾는 물대포의 눈에는 반짝 붉은 불빛이 서린다. 그 두 눈을 마지막으로 본 게 2013년 11월 11일이니 제법 오랜만이었다. 


그래도 2년 전엔 경고 살수에 그쳤고, 요령껏 잘 피했다. 2008년 촛불집회에 나갔을 때는 두 번 모두 충돌 없이 끝났다. 그러니까 나는 어제 내 인생 첫 물대포를 맞았다. 빗맞거나 물포 끝부분을 맞았는데도 아팠다. 



사실 아픔보다 순간의 공포가 컸다. 캡사이신도 이렇게 가까이서 냄새를 맡긴 처음이었다. 기침을 멈출 수가 없더라. 직접 얼굴에 맞은 사람들은 정작 정신을 못차려서 주변에서 계속 물을 찾았다. 2015년 5월인데, 분명 21세기인데... 해저도시는커녕 거리의 풍경조차 시대를 의심하게 만든다. 그러나 현실이다.


# 사람이 막무가내인 경우는 고집이 세거나 분노했을 때다. 유족들은 막무가내였다. 주변에서 말려도 자신들이 물대포를 맞겠다며 맨앞줄에 섰다. 한 어머니는 겁에 질려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경찰 방패를 막았다. 그는 곧 몸을 돌려 두 손으로 방패를 붙잡았다. 미동조차 없었지만 그 뒷모습은 분명 두려운 사람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분은 계속 맨앞줄에 서 있었다. 



이튿날 아침엔 지나가는 운전자와 시비가 붙자 납득하기 어려운 분노를 보였다. 경찰이 안국동 사거리 일부 차선을 확보, 차량 통행이 가능하게 하자 지나가는 운전자들이 '뭐하는 짓들이냐'고 쏘아붙였기 때문이었다. 순간 분위기가 많이 험악해졌다. 화를 내는 운전자들이 이해갔고, 유족들을 보는 마음은 더욱 어지러웠다. 


그들을 막무가내가 되도록 만드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단지 청와대에 있는 한 사람만의 책임일까. 유족들이 1년 넘게 거리에서, 그것도 맨앞에 서 있게 만든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날, 한 아버지는 울부짖으며 도로에 머리를 세차게 찧어댔다.



# "야 진짜 무식하게 쏘아댄다." 


어제 몇 차례 했던 혼잣말이다. 경찰은 캡사이신을 그냥 쏘는 것도 모자랐는지, 물대포에도 섞어버렸다. 한 번 살수한 자리에는 흰 캡사이신 가루가 흥건히 고여있었다. 얇은 카디건 하나 걸쳐입은 채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버리니 너무 추웠다. 



그런데, 매번 이런 식이다. 


사람들이 모여 세를 과시하는 일은 집회의 중요한 방식이며 의미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다. '모인다 → 신고하지 않은 장소로 내달린다 → 경찰에 막힌다 → 몸싸움한다 → 무차별 살수 후 밀린다 → 연행이 이어진다' 라는 이 공식이 늘 반복된다. 경찰의 강경대응과 별개로 매번 이 상황을 지켜볼 때마다 그저 한숨만 나온다. 정말이지 다른 방식은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