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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박기자의 하루

[서초동 일기] 20150625 조금은 서글픈 여름밤

8차선 대로를 건널 수 있는 시간은 약 17초, 마음이 다급해졌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는 2시, 현재 시각은 1시 50분. 결국 배를 움켜잡고 뛰었다. 오늘로 11주 1일차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봤자 경보하는 것보다 조금 빠른 속도였지만 무사히 길 반대편에 도착했다.


지난 화요일, 무수히 쏟아지는 문자 속에 ‘전원합의체 선고사건이 추가됐음을 알려드립니다’란 내용을 휘리릭 넘겼다. 어쨌든 D-Day가 찾아왔으니 일정을 다시 확인해봤다. 아차 싶었다. 이주노조 설립신고서 반려처분 취소소송을 하마터면 빼먹을 뻔한 것 아닌가;


꾸준히 관심 갖고 챙겨본 사건은 아니었다. 몇 년 전, 성소수자인 ‘미셸’이라는 이주노동자를 통역한다는 JB오빠 얘기에 ‘아 그렇구나’했던 기억이 컸을 뿐이었다. 당시 이주노조 4대 위원장이었던 미셸은 합법체류자였다. 그러나 비자가 취소당한 탓에 고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벌써 3년 전 일이다. 


이주노조는 2005년 설립됐고, 곧바로 신고서를 반려당했다. 노동청은 여러 이유를 댔지만, 핵심은 조합원 상당수가 불법체류자라는 점이었다. 이주노조는 설립신고서 반려가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에서 패소했다. 그런데 항소심 재판부 판단은 달랐다. 2007년 2월 1일 재판부는 국적을 떠나 한국에서 고용관계를 맺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을 경우 법률상 근로자에 해당한다며 이주노조의 손을 들어줬다. 


대한민국에서 3심제는 ‘삼세판’이다. 노동청은 예상대로 상고했다. 그런데 대법원이 더디게 움직였다. 2007년 2월 28일 접수된 이 사건의 결론은 2015년 6월 25일에서야 나왔다. 무려 8년 4개월만이다. 이 덕분에 이주노조는 ‘대법원 최장기 미제사건’의 당사자라는 명예 아닌 명예를 얻었다. 그 사이 이주노조 간부들은 줄줄이 한국에서 쫓겨났다. 


승소 판결 확정 후 눈물을 흘리는 섹 알 마문 이주노조 수석부위원장.


대법원은 25일 선고 직후 기자들에게 보낸 보도자료에서 “충실한 심리를 위해 자료 수집 및 연구 조사, 제반 사정 반영 등에 노력을 기울인 관계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고 설명했다. 미국과 일본, EU 등 해외 사례를 확인하고 다문화 가정과 체류 외국인 증가 등 사회변화를 주시했으며, 외국인 근로자의 범죄율과 정부의 강제퇴거 조치 현황 등을 확인하고, 외국인 근로조건 차별 억제로 국민의 고용 확대 유인을 마련할 수 있는지 등을 고민했다고도 덧붙였다.


맞는 말이겠지. 의심하진 않는다. 다만 전원합의체 사건 중 이주노조 소송이 들어가있다고 들었을 때의 ‘찝찝함’을 떠올릴 뿐. 


그 감정은 한줄짜리 주문, “상고를 기각한다”를 듣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대법정이 아닌 2호 법정에서 TV로 지켜보느라 소리가 잘 안 들리기도 했지만 ‘엥? 진짜? 제대로 들었나?’하며 내 귀를 의심했다. 대법원이 항소심 판결을 유지할까라는 의구심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까닭이다. 우려에 비하면, 다수 의견 숫자마저 압도적이었다. 12대 1. 유일한 반대자는 민일영 대법관이었다.


이럴 때마다 한편으론 씁쓸하다. 의심은 불신에서 비롯된다. ‘대법원이 정말 그렇게 판단할까?’라는. 강기훈씨 선고날에도 그랬다. 소부 선고이고, 법률심이니 뒤집힐까 싶으면서도 ‘설마 설마’하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판결을 들은 뒤 주변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괜히 불안했다”는 말을 했는지 모른다. 최고 법원을, 인권의 최후 보루라는 곳을 믿을 수 없어서였다. 


사실관계와 법리를 차갑게 정리하는 판결문에서 따뜻한 한 마디를 기대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주노조 사건의 의미를 설명하는 보도자료 역시 다르지 않았다. 대법원은 “다양한 의견 수렴을 거친 끝에, 시대적인 변화에 맞추어 취업자격 없는 외국인근로자의 노동조합법상 근로자 지위를 인정하고 노동조합 설립 및 가입을 허용하여도 그 부작용을 극복할 만한 여건과 국가적 저력을 갖춘 상황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인권이나 정의라는 가치는 찾아보기 힘든 문장이다. 


법원을 상징하는 정의의 여신은 무엇을 위해 눈을 가리고 있을까. 그래도 여전히 법원에 기대하는 내가 조금은 서글퍼지는 밤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218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