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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박기자의 하루

[서초동 일기] 20150123 압수수색부터 대법원 판결까지



2013년 8월 28일엔 서대문구의 한 커피숍에서 급하게 '통합진보당 관계자 압수수색' 기사를 썼다. 그날 나는 환경담당으로 기후변화 관련 기획 취재를 하고 있었다. 9월 4일에는 국회 근처에 다른 취재를 갔다가 엉겹결에 이석기 전 의원 체포동의안 처리 과정을 봤다. 다음날 구속영장실질심사부터 발부까지 취재하는 것 역시 내몫이었다. 결혼 준비를 하느라 1심은 초기만 담당하기로 했다. 하지만 몇 달 뒤 나는 수원지법 법정에 앉아서 '합정동회합'녹음파일을 듣고 있었다. 증거로 채택된 32개 전부를.


2014년 2월 17일에는 새벽 세 시에 집을 나섰다. 1심 선고공판 방청권을 받기 위해서였다. 상도동 집에서 수원지법까지 걸린 시간은 44분. 법원 당직자는 내게 "아무리 그래도 이 시간에 오시면 어떡하냐"며 난감해했고, 나는 '이도저도 갈 곳 없는 불쌍한 어린양'이라고 호소했다. 그렇게 1심 선고를 직접 들었다. 항소심은 그에 비해 관심이 덜 갔다. 웬만한 주요 증거조사는 다 봤기 때문이었다. 별 기대도 없긴 했기에 무덤덤한 마음으로 8월 11일 2심 선고를 들으러갔다. 그리고 내 귀를 의심했다. 'RO실체를 인정하기엔 증거가 부족하다, 내란 음모는 무죄'라는 판결에.


지난해 12월 19일 휴가까지 반납하며 헌법재판소에 간 이유는 그 항소심 판결이 심어준 기대감 때문이었다. 나는 녹음파일을 들은 날부터 단 한 번도 이석기 의원과 다른 피고인들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여전히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건 도무지 납득이 안 갔다. 아무리 생각이 다를 수 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상하다'므로 '처벌해야 한다'도 보진 않았다.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 위험하다는 얘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그들에게 동의할 사람들은 분명 소수인데 '민주적 기본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의견에 반대한 이유였다. 그러나 헌재 다수는 나와 생각이 많이 달랐다.


오늘 대법원 판결은 예상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의외로 내란 선동 무죄란 소수의견이 나온 점에 놀랐다. 


이 의견을 낸 이인복, 이상훈, 김신 대법관은 피고인들이 이상하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다수의견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세 대법관은 '피고인들이 이상하고 위험한 생각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처벌할 수는 없다'는 데까지 나아갔다. 설령 처벌을 하더라도 국보법을 기준삼으면 충분하다고 했다. 나는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니까 오마이뉴스에서 일하겠지만.


세 대법관의 소수의견은 통합진보당 정당해산에 유일하게 반대한 김이수 헌법재판관의 생각과도 닮아 있었다. 네 사람은 민주주의는 더 넓고 깊게 포용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더욱 굳건해진다고 했다. 우리 체제에 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이석기 의원이나 통합진보당이 '이상하다' 해서 흔들릴 체제가 아니란 얘기다. 


그런 점에서 나는 헌재든 대법원이든 다수의견이 너무 자신감이 없다고 본다. 북한과 경쟁에서 우리는 이미 승리하지 않았는가. 세대 차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지만, 세대 차이라고 느끼는 대목이기도 하다. 적어도 나는 줄곧 남한이 북한보다 우월한 세상에서 살아왔으니까. 


아무튼 이석기 의원은 내게는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 되어버렸다. 압수수색부터 국회 체포동의안에 구속영장 발부와 1•2심 선고, 헌재 결정에 대법원 판결까지 모두 내 이름이 박힌 기사를 썼다. 사실 처음으로 뻗치기를 한 대상이기도 하다. 2012년 5월 8일 그의 집앞에서 오전 5시 반쯤부터 한 시간 반이나 그를 기다렸다. 이때는 상상도 못했다. 반올림해도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의 시끌벅적한 등장부터 황당하면서 씁쓸한 퇴장까지 지켜보게 될 줄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민주주의국가 국민으로선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