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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박기자의 하루

[서초동일기] 20150108 갈림길에 선 법치

ⓒ 권우성


연말에 우연히 글 한 편을 접했다. <민주주의 아닌 법조 지배체제(장은주)>란 제목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꼼꼼히 들여다보진 않았다. ‘법조인들이 지배하는 사회’란 주제 자체가 식상했을 뿐더러 통합진보당, 정당해산, 이석기 등등의 단어로 다시 한 번 머리가 복잡해지긴 싫었다.


해를 넘긴 뒤에야 이 글을 정독했다. 지난 주말 메모해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명단을 살펴보는데 조금 놀랐기 때문이다. 위원장을 포함해 특별조사위원은 모두 17명이다. 이 가운데 14명이 사법시험을 합격한 ‘법조인’이다. 명단은 다음과 같다.


- 가족대책위 추천 : 이석태 변호사(위원장), 장완익 변호사, 이호중 서강대 로스쿨 교수

- 대한변협 추천 : 박종운 변호사, 신현호 변호사

- 여당 추천 : 조대환 변호사, 고영주 변호사, 석동현 변호사, 차기환 변호사, 황전원 전 한국교청 대변인

- 야당 추천 : 권영빈 변호사, 류희인 전 NSC 사무차장, 김서중 성공회대 교수, 최일숙 변호사, 김진 변호사

- 대법원 추천 : 김선혜 연세대 로스쿨 교수(부장판사 출신), 이상철 변호사


이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할까. 


세월호 참사는 국민 모두가 통절한 슬픔을 겪었고, 국민 모두가 진실을 원하는 사건이다. 이것은 진영 논리를 떠나 세월호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특위가 출범한 원동력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그 진상규명을 사실상 법조인들에게만 맡겼다. 법이 상징하는 정의, 공평, 평등의 힘을 믿고 존중한 것일 테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대표하는 ‘엘리트’에게 철저히 기댄 결과는 아닐까도 싶다.


ⓒ이희훈


법은 그 자체로 가치며 권위고, 힘 있는 무기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에 많은 사람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런데 법을 만들고 다루는 사람들은 한국 사회 정점에 선 사람들이다. 국회를 예로 들어보자. 정부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법을 만들 수 있는 이들은 대한민국에 딱 299명뿐이다. 그런데 현재 국회의원 가운데 47명(15.7%)이 법조인 출신이다. 오죽하면 ‘법조 마피아(법피아)’라는 표현까지 나올까. 


물론 법을 잘 알면, 법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더 힘을 실어줄 수 있다. 하지만 법을 잘 알면, ‘있는 사람’들은 그 법을 이용해 더 ‘있는 사람’이 된다. 법을 알고 다룰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출세가 아니라 그 자체로 막강한 권력이다. ‘법대로 싸워보자’는 자연스레 약육강식, 덩치들의 승리로 이어진다. 그동안 수없이 목격해온 일 아닌가.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라 ‘법조 지배체제’ 사회”라는 표현에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좋은 일일까? 아니 나는 우려스럽다. 결국 살아남는 사람들은 뻔하다. 법대로 살 수 있다고 믿었던 작고 약한 사람들은 언젠가는 그 ‘법’에게서 배신당하리라. 이미 겪어봤고, 겪고 있을 테지만. 법을 두고 싸운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자신의 언어로 말할 기회를 잃는 셈이다. 법을 사회 정의요, 계약이라고 말하기에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법을 만드는 사람과 다루는 사람이 얽혀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법을 믿지 않지만, 법을 무기로 쓸 수밖에 없다. 그것이 몸에 맞지 않고 손에 익지 않다 해도.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다른 무기를 염두에 둔 사람들의 승리는 점점 귀한 일이 될 것 같다. 


그 상황이 두렵다. 쓸데없는 걱정이길 바란다. 우리가 그토록 갈망해온 '법치주의'는 법이 지배하는 체제이지(Rule of law) 법으로 지배하는 것(Rule by law)은 아닐 테니.


(참고)


“한국은 권력자들이 법을 수단삼아 휘두르는 ‘법조 지배체제’ 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