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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박기자의 하루

[서초동일기] 20140702 우리는 얼마나 한결같나

연일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사람이 있다. 서울시의원 김아무개씨다. 며칠 전 경찰은 그가 지난 3월 서울시 강서구 내발산동의 한 빌딩에서 벌어졌던 ‘수천억대 재력가 송아무개씨 피살사건’을 주도했다고 발표했다. 사건은 ‘현역 시의원’이라는 피의자의 신분, 돈과 죽음, 탈주극이라는 같은 요소가 골고루 뒤섞인 한 편의 영화였다. 언론의 좋은 먹잇감이기도 했다는 뜻이다. 


한 선배는 그래도 서울이란 도시의 기초의원에 불과한 김아무개의 이름 석자를 부산의 어머니조차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한낮의 TV쇼’를 방불케 할 정도로 채널 곳곳에서 사건을 떠들어댔기 때문이리라. 선배는 이 보도들이 무죄추정원칙을 어기고 있는 건 아니냐고 물었다.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도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비슷한 말을 꺼냈다. 맞다. 사법처리 과정에서 수사는 시작단계일 뿐이다. 모든 유무죄는 최고법원인 대법원에서 확정된다. 그때까지 피고인을 무죄로 보는 것은 헌법이 정한 형사사법체계 기본 원칙이다. 


하지만 가장 잘 지켜지지 않는 원칙이기도 하다. ‘의심병’이라는 근원적 문제는 접어두자. 결정적 이유는 역시, 언론이다. 팩트 전달이 핵심인 사건 기사는 언론보도의 가장 전통적인 문법을, 가장 전형적으로 따라간다. 그만큼 ‘팩트’라는 이름 아래 쉽사리 자극적인 내용을 담거나 사람들의 편견을 강화시키거나 원칙을 흐트러뜨리기 쉬운 기사다. 간단하다. “팩트인데”라는 말 한 마디면 많은 상황을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현역 시의원의 살인교사’를 제목이나 기사 내용에서 계속 강조하는 건 자극적이지 않아?”

“팩트인데.” 


“아직 혐의가 확실한 건 아니잖아?” 

“증거 인멸이나 도주 우려가 있어서 구속됐어. 팩트인데.”


2013년 6월 '대구 여대생살인사건' 현장검증 장면. ⓒ 조정훈


벼랑 끝에서도 무죄추정원칙을 지킬 방법은 하나 있다. 바로 ‘이름’이다. 신상 정보만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면, 적어도 ‘여론재판부’가 그를 상대로 무죄추정원칙을 지킬 수는 있다. 체포, 구속, 그리고 검찰 구형이 판결처럼 받아들여지는 한국 사회라면 익명 처리는 더욱 힘을 쓸 수 있다. 기자가 알고 검사가 알고, 변호사와 판사가 알아도 적어도 대중들은 모를 테니까. 


그런데 형사 사건에서 익명 처리를 결정하는 기준처럼 불분명한 게 없다. 정부는 나름 규칙이 있긴 하다. 언론은 다르다. 기자들은 말한다. ‘국민의 알 권리’와 ‘공익’이 잣대라고. 이 말만큼 모호한 기준이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최근 국정원 증거조작사건 공판 기사를 썼다. 전화가 왔다. 국정원 직원의 이름은 가려달라는 요청이었다. 이전까지 언론이 국정원을 다룰 때 차장급 이하는 ‘아무개씨’로 처리하곤 했다. 하지만 국가기관이 사법체계를 뒤흔든 사건에서 단지 그들이 ‘현직’이기에 이름을 밝히지 않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국정원 피고인 가운데 똑같이 ‘4급 공무원’인 두 사람 중 한 명만 실명처리하는 일은 형평성이 떨어져보였고, 범죄행위만 봐도 공개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도 봤다. 데스크 생각도 비슷했다. 국정원 요청으로 다시 한 번 논의하긴 했지만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김아무개 시의원 사건을 실명보도하는 매체의 기준, 의사 결정 과정 역시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물론 법무부 ‘인권보호를 위한 수사공보준칙’에는 실명 공개 대상에 ‘기초의원’를 못박아놓진 않았다. 지방의회의 경우 ‘지방의회 의장’ 정도만 규정해뒀을 뿐이다. 결국 판단은 자의적이다. 선택의 영역이다. 단순 비교하긴 어렵지만, 4급 공무원의 이름을 공개한 기사나 기초의원을 공개한 기사는 얼마나 다를까? 제각각 얼마나 ‘알 권리’와 ‘공익’에 기여할까? 


단순하게, 그러나 철저히 피의사실 공표 혹은 ‘유죄추정’을 발본색원하려면 ‘익명보도’를 택해야 한다. 하지만 이때에도 알 권리와 공익이 다시 충돌한다. 제자리다. 전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으로선 좀처럼 답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다. 우리는 오랜 딜레마에 빠져있다.


2009년 8월 <신문과 방송>이 언론인과 언론학자 467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를 봐도, 지금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당시 “‘피의사실을 다룬 기사가 여론재판이 된다’는 시각에 동의하는 사람은 응답자의 77.5%에 달했다. 하지만 ‘피의사실 공표는 국민의 알 권리 등 공익적 목적을 위해서 필요하다’에 찬성하는 이도 49.7%(반대 37.5%)였다. 공인은 괜찮다는 응답은 전체 58.0%(반대 33.0%)를 차지했다. 


기소 단계부터 범죄사실을 공개해야 하며 피의자의 반론을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는 답이 그나마 현실과 원칙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은 말 같긴 하다. 경찰발로 온갖 수사내용이 쏟아져 나오는 김아무개 시의원 보도는 분명 잘못됐다. 그런데 또 한 사례가 걸린다. 국정원 대선개입사건이다. 이때 상당수 언론들은 국정원 김하영 직원의 이름을 공개했고, 그 수사과정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보도했다. 10점 만점에 10점은 아니어도 나름 적절한 견제와 감시가 이뤄졌다. 기소 전 단계에서. 


'국정원 대선개입사건' 청문회에서 가림막 너머에 앉아 증언하는 국정원 직원들. ⓒ 사진공동취재단


글을 쓰는 나도 혼란스럽다. ‘케바케(Case by case)’라고 할 일들이 너무 많다. 국경선이라면 모를까 가치와 가치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다 막아버릴 수도, 열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만 최소한의 원칙을 공유하는 일은 시급해보인다. 피의사실공표가 필요하더라도, 지금처럼 정치 상황에 따라 공표 대상과 범위가 제각각이고 제3자가 유무죄를 단정 짓게 만드는 보도는 답이 아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길을 잃지 않고 갈 수 있을까. 우리의 잣대는 얼마나 한결 같을 수 있을까. 세상은 넓고, 풀어야 할 숙제들은 많고, 우리가 가야 할 일은 유독 멀어보이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