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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박기자의 하루

시국선언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

어딜 가나 총대를 메는 사람들이 있다. 대개 성향 또는 선택의 문제인데 ‘직책’에 따른 ‘책임’일 때도 많다. 학급 반장이 좋은 예다. 급식비를 내든, 숙제를 하든, 반장은 늘 앞장 선다. ‘같은 반’이란 조직 안에서 ‘친구들’이란 구성원들을 대표하는 위치니까. 노동조합이라는,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고 원칙을 지켜야 하는 단체에서도 마찬가지다.


언론노조의 '세월호 참사 관련 현업 언론인 시국선언'은 그런 총대 메기였다. 기레기라는 말이 언론을 비하하는 용어로 등장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하지만 세월호 보도는 특정 기사나 기자에만 붙던 기레기 딱지를 집단 전체에 철썩 붙이는 근거가 됐다. 언론노동자라는 집단이 잘못을 저질렀고, 원칙을 훼손했으니 집행부는 어떤 식으로든 행동이 필요하고 봤을 것이다. 마침 김시곤 보도국장의 폭로로 KBS사태까지 불거졌으니 더욱 ‘때가 됐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노조는 총대를 멨다. 거기에 5623명이 동참했다.


나는 참여하지 않았다. ‘세월호 보도를 반성한다’는 기조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시국선언문의 내용과 발표 방식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언론의 사명을 다시 가슴에 새기겠습니다”란 첫 문장 뒤에는 다음 내용이 이어진다.


“사건 당일 '전원 구조'라는 언론 역사상 최악의 대형 오보를 저질러 실종자 가족들을 비롯한 전 국민을 충격과 분노에 빠뜨렸습니다. 취재를 통한 사실 확인보다는 정부의 발표를 받아쓰기에 급급한 나머지 오직 진실규명을 바라는 국민들의 한결같은 바람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슬픔에 빠진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에게 위로는커녕 망언을 내뱉는 공영방송 간부라는 사람들의 패륜적인 행태도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청와대의 지시'를 받아 공영방송 KBS의 보도를 좌지우지해왔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길환영 사장도 아직 쫓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원 구조’는 분명 대형 오보였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취재가 아니었는가? 상세한 과정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가장 먼저 ‘전원 구조’ 소식을 전한 곳들은 나름의 ‘소스’가 있었다. 당국은 전원 구조를 발표한 적이 없다. 불완전한 취재를 확인 없이, 일단 빨리 속보부터 내자는 식으로 보도한 일은 명확히 밝히지 않고 왜 ‘정부의 발표’에 책임을 돌리는가. 


설령 ‘전원 구조’가 정부 발표였다고 해도 재난보도에서 구조 상황과 인명피해 등을 공식 자료를 기반으로 보도하는 것은 기본이고 원칙이다. 기자들이 제각각 취재로 저마다 다른 숫자들을 쏟아냈다면 어땠을까. 혼선과 분노는 더욱 커졌을 것은 불 보듯 뻔 한 일이다. 


‘검증’이 부족했던 일이었지 단순히 ‘우리가 취재를 안해서 잘못했어요’라고 할 문제는 아니란 뜻이다.  그리고 ‘공영방송 간부라는 사람들의 패륜적인 행태’는 과연 우리가 막을 수 있는 일인가? ‘길환영 사장 쫓아내기’는 적절한 대안인가? 이 모든 의문을 떠나서 과연 간부들의 행동은 세월호 보도문제와 어떻게 닿아있는가? 시국선언은 이번 보도를 반성하기 보다는, 시스템을 고민하는 모습 보다는 ‘주변 상황’에 책임을 돌리고 있다.


‘언론노동자’라는 집단 전체의 상황과 의견을 대변하고 있지 못한 문제도 컸다. 가장 동의하지 못했던 내용이다.


“국민 여러분께 정말 죄송합니다. 막말하는 간부도, 대통령만 바라보고 가는 사장도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권력이 언론을 손에 쥐고 휘두르려 하는데도 목숨 걸고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국민의 눈과 귀와 입이 되지는 못할망정 국민의 눈과 귀와 입을 가리는 데 일조하고 말았습니다. 방송을 장악하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말도 지지부진하기만 했던 국회의 방송공정성 논의도 이행하도록 만들지 못했습니다.”


잘라 말하자면, 이건 온전히 KBS 상황이다. KBS 기자들이 얼마나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안타까움, 동료의식과 별개로 이건 세월호 사고를 계기로 나온 시국선언문이지 KBS 사태를 문제삼고, 그곳 구성원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성명서가 아니다. 그 뜻이었다면 제목부터 바꿔야했다. 세월호 보도를 첫 머리에 언급하지 말았어야 했다. 


애당초 이 시국선언문이 왜 나온 건지, 왜 필요한 건지 의아했다. 글을 읽어갈수록 의문은 더 커졌고, 여기선 아예 ‘부동의’로 바뀌었다. 공영방송사에 내려오는 ‘낙하산’을 막고 국회에서 방송 공정성 논의를 이행하도록 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세월호 이전부터 줄곧 되풀이됐던 문제다. 추상적 표현과 옛 방식으로는 막아오지 못했던 일이기도 하다. 언론인들이 반성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하지만, 꼭 현 시국에 빌어 화두로 꺼낼 사안은 아니다.


2014년 4월 16일, 언론사들은 속보를 토해내기에 급급했다. 기자들은 단원고 학생들의 책상을 뒤져 아이템을 찾았고, 가족인양 정부 관계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가족들의 절망, 분노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고, 정부가 발표한 숫자들을 꼼꼼히 검증하지도 않았다. 사고 이후에도 수많은 감성팔이 보도가 쏟아졌고,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쪽 상황은 스포츠중계처럼 다뤄졌다. 


세월호를 말하려면, “세월호와 함께 속절없이 스러져간 희생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자 우리에게 부여된 영원한 사명”을 외치려면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되짚어보고 고쳐가야 한다. 정치권력을 상대로 한 싸움과 별개로 ‘관행’이란 이름으로 매번 퉁치고 넘겨왔던 문제들을 뼈저리게 반성해야 한다. 관행은 유령처럼 언론 주변을 맴돌면서 권력만큼이나 엄청난 힘을 발휘해왔다. 기레기의 굵은 뿌리 하나는 잘못된 관행이다.


하지만 언론노조는 ‘시국선언’이라는 또 다른 관행으로, 굉장히 상투적이고 본질을 말하지 못하는 표현으로 총대를 멨다. '지면광고'라는 홍보방식에도 의아했다. 물론 쉬운 결정이 아니었으리라. 문구를 정하고 참가자를 모으는 과정들 역시 까다로웠을 테고. 그럼에도 나는 차마 내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 정작 대면해야 할 적을 겨누지 못한 채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