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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박기자의 하루

[서초동일기] 20140220 그는 대법원 판결을 볼 수 있을까

‘유서대필사건’의 강기훈씨가 13일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08년 1월 31일 재심을 청구한 지 6년, 사건이 발생한 지 23년 만이다. 하지만 그는 무덤덤했다. 그토록 기다렸을 “무죄”란 두 단어가 재판장의 입에서 나왔는데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오랜 세월 누명에 몸과 마음이 할퀴어진 사람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


아직 끝난 싸움이 아니라 여겼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는 1월 16일 최후 진술에서도 “어떤 판결이 나오더라도 재판이 끝난 것은 아니다, 대법원으로 가겠죠”라고 말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상고할 수 있는 기간이 딱 하루 남았던 19일, 검찰은 유서대필사건 상고 뜻을 밝혔다. 과거 대법원 판결에서도 유죄 증거로 인정됐던 1991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필적 감정 결과를 재심 재판부가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다시 한 번 최고법원의 판단을 구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 '유서대필' 강기훈 22만에 무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자살방조)로 1992년 징역 3년을 선고받았던 강기훈씨가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 결심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소회를 밝히고 있다. ⓒ 유성호



강기훈씨는 지금까지 모두 여섯 번의 법정다툼을 겪었다. 1991년 사건이 발생한 뒤 2달 만에 기소, 그해 12월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92년 연거푸 열린 2·3심도 그에게 모두 유죄를 선고했다. 1994년 만기출소한 그는 재심을 청구하려고 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2007년 11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김기설씨 유서 필적과 강기훈씨 것은 다르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길이 열렸다. 


해가 바뀌자마자 그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2009년 9월 16일 서울고법 형사10부(부장판사 이강원)는 ▲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 1992년과 다른 필적 감정 결과가 나왔고 ▲ 과거 감정에 참여했던 국과수 직원들이 당시 증언을 번복했다는 점 등을 인정,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검찰은 곧바로 재항고했다. 대법원은 2012년 10월 19일 검찰의 재항고를 기각하고 재심 개시를 확정했다. 그해 말 서울고법에서 시작된 재심에서 강씨는 마침내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검찰의 상고로 다시 대법원에 가야 한다.


23년 동안 그를 변호해온 이석태 변호사는 “대법원에서 (유무죄 판결이) 다시 뒤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국과수는 재심 과정에서 마지막 필적 감정을 진행, 유서를 김기설씨 본인이 썼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 자신들이 정리한 김씨만의 고유한 필적은 강기훈씨뿐 아니라 무작위로 필적을 감정한 700명에게서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기 보다는 ‘김기설이 썼다’고 인정한 셈이다. 


1991년 5월 27일 강기훈씨가 명동성당에서 필적실연을 해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사실들은 23년 동안 강씨가 외쳐온 진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석태 변호사가 자신감을 보이는 이유다. 또 대법원은 고등법원이 인정한 사실관계를 기반으로, 법리적용이 적절한지만 따지기 때문에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신 쓰지 않았다’는 고등법원의 사실관계 판단이 흔들릴 가능성은 낮다. 대법원은 이전에도 “상고할 때에는 원심 판결에 헌법이나 법률 등의 위반이 있었다는 이유를 주장해야지, 사실오인을 근거로 내세우면 안 된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문제는 시간이다. 강기훈씨는 많이 아프다. 그는 몇 년 전부터 간암을 앓고 있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2012년 12월 재심 첫 공판일 사진과 2014년 2월 13일 선고공판 때 직접 본 모습에선 차이가 났다. 얼굴에는 붉은 기가 강해졌고, 체격은 많이 야위어있었다. 어조는 단단했지만, 목소리에선 힘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재판을 방청하러 온 많은 사람들이 그의 건강을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재심 개시 결정을 하기까지, 대법원의 움직임은 더뎠다. 심리에 들어간 시간만 3년이었다. 한쪽에선 주심인 양창수 대법관이 자신의 고교·대학 선배들이 내린 재판을 재심하는 데에 부담을 느끼고 결정을 차일피일 미루는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재심 관련 자료를 대법원 캐비닛에 묵혀두고 있다는 음모론 아닌 음모론도 섞여 있었다. 


이번엔 다를까. 유서대필사건은 몹시 복잡하고 민감한 사건이다. ‘동료를 죽음으로 내모는 비열한 사람들’이란 이미지는 1991년 분신정국 속에서 운동권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그해 6월 3일 ‘정원식 봉변사건’은 결정타였다. 많은 민주화세력은 손가락질 받았고, 상처 입었다. 유서대필사건의 1·2·3심 판결은 그 상처를 더욱 깊고 넓게 만들었다. 


결국 이 사건 무죄판결은 정부만이 아니라 사법부까지 과거의 잘못을 인정, 사과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검찰과 사법부, 그리고 정부가 얼마나 선뜻 ‘미안하다’고 할까?


이용훈 대법원장 시절, 법원은 긴급조치 위헌 선고나 간첩 조작사건 재심 무죄 판결 등 과오를 바로 잡으려는 모습을 보였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이야기가 많다. 검찰은? 3대 권력기관 가운데 유일하게 과거사 정리작업을 하지 않은 곳이 검찰이다. 최근 "사실관계의 확정문제라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낮다"며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재상고를 포기한 것과 달리, 재심사건에선 '상고 포기'를 모르는 모습도 걸린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동안 과거사 문제를 두고 보여 온 태도들도 걱정을 키운다.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강기훈씨 본인조차 최후 진술 때 “(재심 청구 때) 검찰의 항고로 인해 대법원에서 흐른 시간이 거의 3년”이라며 “이번엔 얼마나 더 시간을 보낼지 알 길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23년이란 숫자는 얼마나 더 늘어날까. 그는 대법원 판결을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