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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박기자의 하루

[서초동일기] 20140107 그의 진짜 표정이 궁금해졌다

▲ 첫차가 새벽을 가르며 달리고 있다. ⓒ 임석빈 주간경향 인턴기자


'이번 열차는 OO행 첫차입니다'라는 방송을 정확히 들은 건지, 아닌지 지금도 가물가물하다. 4시 50분쯤부터 눈이 떠졌고, 긴장한 탓에 단 5분도 더 잠들 수 없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아직 세상은 밤의 품에 안겨 있었다. 공기는 예상보다 포근했다. 멀리서 보이는 붉은색 '500번' 버스 표지를 보고 부리나케 뛰어도 견딜만한 정도였다. 


그렇게 오랜만에 지하철 첫차를 탔다. 불금을 보낸 다음날에도 놀랄 때 많았다. 주5일제가 시행된 지 몇 해가 흘렀는데도 여전히 토요일 새벽에 일하러 가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으니까. 하물며 화요일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다. 8~9시 출근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지하철 2호선 안은 제법 꽉 찬 모양새였다. 조금 피곤한 기색의 젊은이들과 달리 50~6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들은 쌩쌩했다. 붉은 립스틱을 정성껏 바른 그들은 나와 함께 강남역에서 우르르 내렸다. 새색시마냥 고운 얼굴을 작업복과 고무장갑, 청소도구로 가린 채, 그들은 종일 강남 빌딩숲 구석구석을 오가고 있을지 모른다.


# 모처럼 첫차까지 타며 부지런히 움직인 까닭은 '그'였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제법 '인연'이다. 그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 나는 남성역 부근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몇 시간 동안 기다렸다. 이틀째 아침, 마침내 그가 나타났다. 초대받지 못한 인물의 등장에 당황하거나 화를 낼 법한데도, 그는 여유있는 표정으로 몇 마디를 남겼다.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던 9월 4일, 5일에도 마찬가지였다. '내란음모죄'라는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로, 국회의원으로는 헌정사상 두 번째로 구속당하게 된 상황이지만 그는 순간순간 미소를 지었다. 영장 발부 직후 자신을 강제로 끌고 나가는 국정원 직원들을 향해 "야 이 도둑놈들아!"라고 소리지르는 모습이 차라리 인간적으로 보이기까지했다. 


특유의 여유로움은 마치 두터운 갑옷처럼 그를 감싸고 있었다. 두번째 공판 이후 2달여만에 법정에서 지켜본 모습은 변함없었다. '지하조직RO 비밀회합'으로 의심받는 2013년 5월 곤지암·합정동 모임 녹음파일이 법정에 울려퍼질 때에도. 곤지암 모임 청취 초반, 시끄럽게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가 연이어 나오자 그와 동료들은 웃음을 참기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녹음파일이 점점 사건의 핵심이랄 수 있는, 그의 강연 내용을 들려주자 여유는 사라졌다. 그를 많이 본 적은 없지만, 그토록 진지하고 무거운 표정은 처음이었다.  전체 재판시간 7시간 30분 중 다섯시간여 동안 녹음파일을 듣는 내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힐끔힐끔 쳐다볼 때마 그의 시선은 탁자 위 녹취록에 꽂혀있었다.몇 달 새 눈가 주름은 깊어진 듯했다. 


17시간만에 다시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늦은 시각에도 2호선 열차 안은 여전히 사람들로 가득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고, 등돌려진, 철저히 섬이 되어버린 이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법정' 같은 무대 뒤에서도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일까. 진짜 그의 표정은 무엇일까.


▲ 내란음모 혐의를 받고 있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 남소연


(참고) "분단이 낳은 두 괴물 : 하나는 경기동부, 다른 하나는 국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