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펜 끝을 벼리다/박기자의 하루

[서초동일기] 20131202 빨대가 필요한 시간

"너 빨대 있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하기 싫은 말을 꺼내야 했다, 그게 사실이니까. 


"없는데요..." 


"그럼 접어. 할 수도 없는 걸 왜 하려고 그래."


곧 12월 7일이 온다. 평소보다 조금 늦장을 부려도 30~40분이면 거뜬히 출근할 수 있는, 하지만 '지옥이 있다면 여기일까'를 그 시간 내내 자문하게 하는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아침마다 서초동으로 출근한 지 두 달을 채우는 날이다. 숨 막힐 듯 한 출근을 마치면, 숨 막힐 듯 한 일들이 이어지는 날이 있었다. '오늘은 뭐하지, 칼퇴나 할까'란 생각으로 그냥저냥 넘기는 날도 있었고, 기사 하나 쓰고 정보보고 하나 하고 생색내는 날 역시 제법이었다. 


12월 2일은 새로운 유형을 만들었다. '오늘은 뭐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네'의 날. 출근길 스마트폰으로 <한겨레> 단독 기사를 확인했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퇴진 드라마에 또 한 명의 등장인물이 추가됐다는. 지난주 원세훈 전 국정원장 측근에 이어 이번엔 청와대 행정관이다. '사정당국 관계자에 따르면' 그는 원 전 원장이 기소되기 3일 전, 서초구청 행정지원국장에게 '혼외아들 논란' 관련 가족관계부 조회를 요청했다. 검찰은 이들의 휴대전화를 조사 중이라고 '알려졌다.'


단독이 부럽기도 했지만, 그보다 '빨대'가 부러웠다. 빨대, 흔히 '취재원'을 뜻하는 은어다. 검찰처럼 폐쇄적이고, 상명하복 질서가 딱딱 각 잡혀있는 곳일수록 내부 분위기를 파악하고 정보를 확보하려면 빨대는 필수다. 그러려면 일단 누구든 만나서 얼굴 트고 이야기하고 해야 할텐데, 아직 요원한 일이다. 기자실 문밖에서 서성여서라고 말하고 핑계대면 편하겠지만, 그게 전부가 아님을 알기에 마음은 불편할 거다. 


날이 추워졌지만 발을 동동 굴러가며 누군가의 소환 또는 귀가를 기다리는 일은 차라리 쉽다. 목과 어깨가 다시 고통스럽겠지만 종일 투닥투닥 재판장과 검사, 변호인의 말을 받아치는 일도 비슷하다. 몸으로 때루는 현장, 많은 기자들이 함께 하고 있는 현장은 소중하지만 가끔 그게 전부처럼 느껴질 땐 일상이 꼭 공갈빵 같다. 모양은 그럴싸하지만 속은 텅 비어 있는. 그나마 맛이라도 무난한 편인 게 다행이다.


10여일 휴가 끝 무렵, 문득 내 기사는 ‘똥’이나 ‘독’이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 “아직 똥일 수밖에 없고 독이 아니면 다행이다, 일단은 어떻게 하면 다른 기사를 쓸 수 있을지 고민해”라고 ㅇ선배는 말했다. 그 ‘다른 기사’를 쓰고 싶고, 그래서 ‘똥’이나 ‘독’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데 오늘 같은 날은 참 막막한 기분이다. 전학 첫날, 아무도 날 찾지 않는 교실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느낌이랄까. 시간이 약이다 싶으면서도 계속 풀리지 않을 숙제 같기도 하다.


팔 뻗을 공간만 확보해도 행운이지만... ⓒ 이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