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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박기자의 하루

[서초동일기] 20131105 직업병이 심해져간다

누군가를 미워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오늘은 부디 조용하길…’이라는 짧은 기도를 올린다. 지난달 7일부터 달라진 일상이다. 회사는 이날부터 법조팀을 가동했다. 몇 년 전 검찰 출입을 맡은 선배들이 있긴 했지만, ‘팀’ 규모로 검찰에서 법원까지 도맡는 일은 <오마이뉴스> 역사상 처음이라고 들었다. 어깨가 무거우면서도 막막했다. 지금은 어깨가 아프다.


간혹 선배를 돕기 위해 참여했던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 재판 취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고, 지난 3주 동안은 국회 국정감사 기간이었다. 중간 중간 나꼼수 국민참여재판도 있었다. 열심히 키보드 자판을, 정신없이 두드려야했다. ‘토씨’ 하나에도 민감한 건 정치인만이 아니었으니까. 아니, 법원과 검찰에서 오가는 토씨 하나는 누군가에겐 독이, 또 누군가에겐 복이 될 수 있는 터라 더 무겁게 느껴졌다. 목과 어깨에 자연스레 힘이 더 들어갔고, 다시 손끝과 발끝이 저리고 있다. 쉽사리 나아질 증상은 아니다.


어제는 아침부터 뻐근한 몸을 꾹꾹 누르고 있는 찰나에 속보가 떴다.


‘통합진보당 정당 해산 심판 청구안, 국무회의 통과’


조용하리라 믿었던 하루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팀원 선배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도 곧이어 들려왔다. 선배는 담담하게 “지금 부산에 가봐야 한다”고 말했지만 낯빛은 창백했다. 어수선한 마음을 추스르고 오후 2시 서울고등검찰청 대회의실로 향했다.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표정도, 말투도 당당했다. 통합진보당의 위헌성 검토 작업을 총괄한 법무부 TF팀장은 1시간여 동안 한 번도 말끝을 흐리지 않았다. 줄곧 자신감만 보였다. 하지만 법무부가 ‘북한식 사회주의’를 따랐다며 제시한 사례들은 대개 당 강령 문구 등 추상적이었다. ‘구체적 행위’로 예시한 이석기 의원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분명한 건 그와 소위 ‘RO’조직원들은 아직까진 ‘죄인’이 아니란 점이다. 법원은 아직 그 판단을 하기 위한 증인 신문, 증거 검토 작업 등을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여론은 늘 원칙보다 힘이 세다. ‘무죄추정원칙’보다 곳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여론몰이’식 보도와 반응들이 언제나 정국을 움직인다.


딱딱하고 어려운 법리, 사실관계 등을 떠나 의아한 구석도 있다. 이날 오전 6시, 법무부는 통합진보당 정당 해산 심판 청구안을 국무회의 긴급 안건으로 상정했다. 두 시간 뒤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 안건은 심의·의결됐고, 오후 2시 반쯤 박근혜 대통령이 전자결재로 재가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법무부는 낮 12시쯤 헌법재판소에 청구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직접 속보로 '법무부, 청구서 제출'을 확인한 시각은 오후 2시 24분이다. 그런데 청구서에는 이미 박 대통령의 서명이 쓰인 서류가 첨부돼있었다. 그럼 전자결재의 효력은? 이미 청구서를 제출한 다음에 대통령 재가 절차를 밟는 일은 적법한 것일까?


뱀발) 뒤늦게 확인해보니 오전 9시쯤 박근혜 대통령이 전자결재로 재가했고, 법무부는 이후에 헌재로 청구서를 제출했다고 보도됐다. 

http://joongang.joins.com/article/aid/2013/11/06/12650249.html?cloc=olink|article|default


▲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를 비롯한 당 관계자들이 5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정부의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한 데 대해 '제2의 긴급조치, 반 민주적 진보당 해산기도 중단'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남소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