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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박기자의 하루

[서초동일기] 20140911 원세훈 1심 판결이 남긴 몇 가지

정신없는 하루였다. 새벽닭 우는 소리에 눈 비비고 일어나 첫차를 타고 제주공항에 도착, 9시 20분 서울 땅에 다시 발을 디딘 다음 부랴부랴 집에 짐을 풀고 서초동으로 향했다. 2012년 12월부터 그림자처럼 떨어지지 않던 그 사건, 국정원 대선개입사건의 1심 판결을 취재하기 위해. 전부 무죄 판결에, 검사가 재판장 멱살을 잡는 꿈까지 꾼 터라 괜히 뒤숭숭했다. 자리를 맡기 위해 일찌감치 법정 복도에 도착해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데도 어찌나 초조하던지. 결국 절반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법원의 판단에 씁쓸했다.


이 아저씨 때문에 몸싸움하느라 아직도 삭신이... ⓒ 유성호


판결문은 별지를 포함해 모두 204쪽에 달한다. 하지만 이틀에 걸쳐 다 읽고 난 뒤에도 여전히 물음표는 사라지지 않았다. 11일 페이스북에 짧게 쓰긴 했지만 공직선거법 무죄 판결의 근거는 크게 1)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의 사이버활동은 공직선거법상 선거운동에 해당하지 않는데 2) 꾸준히 활동하긴 했지만 선거가 임박한 시기에는 그 양이 줄어들었고 3) 원세훈 전 원장이 여러 차례 '정치개입 논란 등 물의를 일으킬 수 있는 행동은 자제하라'고 얘기했다는 점 등 세 가지다. 


하지만 재판부 스스로 "그 구체적인 활동 내용이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에 대한 지지 또는 반대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하면서도, 심리전단의 사이버활동이 선거운동이 아니라고 대목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검찰이 기소할 때 법 조항을 잘못 적용했다는 듯 "피고인들의 행위가 '선거 또는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 해당할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식으로 언급한 것 역시 '빠져나갈 구멍' 아닌가도 싶다. 옛 공직선거법 86조 1항은 '예비적 기소' 대상이지 핵심은 아니지않은가. 아무튼 잘못됐다고만 하긴 어렵지만, 찜찜한 구석이 가득한 판결이긴 하다. 오죽하면 현직 부장판사가 "지록위마의 판결"이라고 피를 토하듯 비판했을까도 싶고.


판결 자체 얘기는 일단 여기까지 하고. 오랜만에 끄적거리는 이유는 204쪽에 숨어 있는 몇 가지 재밌는 대목들을 기록해두기 위해서다. 


# 윤석열, 그가 옳았다.


ⓒ 유성호


'국정원 대선개입사건'은 등장인물이 참 많다. 그 복잡하고 흩어진 이야기들 속에서도 강력한 인상을 남긴 사람들이 몇몇 있는데, 그 중 하나를 꼽는다면 나는 윤석열 전 팀장을 들겠다. 전해 들은 이야기도 있고, 법정에서 지켜본 모습 등을 종합해볼 때 그는 '불곰' 같은 사람이다. 우직하면서도 강단 있는. 말 한 마디도 참 시원시원하게 한다. 지난해 가을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장을 초토화시켰던 '작심 발언'도 여기서 나온 것이리라.


하지만 그 역시 '비운의 사나이'이기도 하다. 2013년 10월 18일, 윤석열 전 팀장은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무리한 수사를 강행했다는 이유로 직무에서 배제당했다. 국정원의 트위터공작을 파헤치기 위해 심리전단 안보 5팀원들을 긴급체포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일이었다. 당시 검찰 지휘부는 이 절차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고 했다. 국정원 직원들의 신병을 확보하려면 국정원에 미리 통보해야하는데, 그러한 일이 없었다는 얘기였다. 원 전 원장 등의 변호인들은 이 일을 빌미로 1) 검찰의 긴급체포 과정은 위법했고 2) 이 일로 작성된 피의자신문조서 등은 증거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11일 재판부는 윤 전 팀장의 손을 들어줬다. "비록 검사가 국정원직원법이 정한 사전 통보 절차를 누락하긴 했으나 중대한 위법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다"고 말이다. 재판부는 국정원 직원들을 구속·체포하는 데에 국정원장의 승낙 또는 승인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검사가 그들을 체포한 , 뒤 조사를 시작하기 전에 국정원에 그 사실을 통보했으니 위법 문제도 어느 정도 해소됐다고 덧붙였다.


# '국정원'이면 다 비밀? 아니다


이 사건은 국정원 심리전단 안보3팀 5파트 김하영에서 출발했다. 초기 수사를 맡은 경찰에게는 그의 컴퓨터, 그리고 휴대폰이 중요한 단서였다. 판결문에 따르면 수서경찰서는 2013년 4월 김하영의 휴대폰을 압수, 거기에 담긴 연락처와 메시지 등을 분석해 심리전단 편제와 팀원, 연락처 등을 파악했다. 당시 국정원은 이 내용들이 직무상 비밀이라 국정원 승낙없이는 압수할 수 없다며 경찰에 반환을 요구했지만 경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변호인단은 이 정보들 역시 위법수집증거라고 주장했다.


재판부 생각은 달랐다. 법원은 그 정보들이 "직무상 비밀로서 보호되어야 할 가치가 있음은 분명하나, 수사기관에 압수된다고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해하진 않아 보인다"고 했다. '국정원'이라는 세 글자면, '업무상 비밀'이라는 말이면 무소불위처럼 굴었던 국정원의 행태에 제동을 건 셈이다. 


# 트위터는 개인 정보


변호인단은 검찰의 주장을 깨기 위해 거듭 '독수독과론' 주장을 펼쳤다. 그 결과 트위터 증거 상당수가 날아갔다. 공직선거법 무죄가 나온 배경에는 '선거운동'이라고 충분히 인정받을 만한 증거들이 채택되지 않은 이유도 있지 않을까라는 게 내 추측이다(확인해보고 싶지만, 재판부가 그 증거채부 절차를 판결문에 일일이 다 적시하지 않았다. 78만여건이니 이해는 간다만, 그래도 좀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이 대목을 읽어내려가는 중에 눈길을 끄는 지점이 있었다. 변호인들은 트위터가 식별이 가능한 개인정보이기 때문에 검찰이 수사에 사용하려면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발부받아 압수절차 등을 밟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그 주장 일부를 받아들였다. "트위터가 비실명 가입이 가능한 서비스이고 빅데이터 업체가 수집한 트위터 정보에 주민등록번호 등과 같은 개인식별자료까지 포함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트위터 정보를 종합하거나 다른 정보와 쉽게 결합해 특정 개인의 식별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한 마디로, 트위터 정보 역시 개인정보보호법상 개인정보라는 얘기다. 


약간 의외구나 싶었다. 트위터 이용자들은 대개 자신이 누구인지를 공개하고 있지만, 충분히 본인을 감추거나 다른 사람인 척할 수도 있다. 재판부가 언급했듯 비실명 가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 개인정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과연 트위터 정보를 개인정보보호법상 개인정보로 봐야하는지는 판단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어 보였다. 재판부는 이 지점에서 개인정보보호법 2조 1호가 개인정보의 정의 중 하나를 "특정 개인을 알아볼 수 없더라도 다른 정보와 쉽게 결합하여 알아 볼 수 있는 정보"로도 한 점을 짚었다. 다만 빅데이터업체가 트위터 이용자의 요청이 있을 경우 보관 중인 정보를 삭제하는 만큼, 업체의 트위터 정보 수집 자체가 위법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 그들의 '모르쇠' 짬짜미는?


ⓒ 김지현


1년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법정에는 수많은 국정원 직원들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불리한 대목에서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기억 안 난다"는 답변을 내놨다는 점.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핑계'라고 반응할 법했다. 재판장마저 '그게 말이 되냐'는 식으로 일갈할 정도였으니까. 


'모르쇠' 작전은 검찰 조사 때 일부 직원들이 술술 불어버린 내용들을 부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내용들 중에는 조직의 끝, 파트원부터 정점인 원세훈까지 어떻게 이어졌는지 추론할 수 있는 것도 있었다. 결국 이 사건의 피고인은 원세훈, 그리고 3차장인 이종명과 심리전단장 민병주 아닌가. 이 상명하복 관계에서 어떤 지시가 내려졌고, 그것이 어떻게 실행됐는지가 입증되지 않으면 재판 결과는 빤했다. 


다행히 재판부는 국정원 직원들의 검찰 진술 내용 등을 어느 정도 증거로 인정했다. 하지만 그들의 법정진술이 믿을만한지 여부는 꼬집지 않았다. 이런 식의 '짬짜미'는 김용판 공판에서도 여러 번 반복됐던 일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선 '기억 안 난다'는 말조차 위증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법원이 '모르쇠' 작전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신호 정도는 줘야하지 않을까 싶었던 이유다. 특히 이번 사건처럼 국가기관이 얽힌 일에선 얼마든지 되풀이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