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애매모호하고 정확한

다시, 세월호 선배의 배려로 연말과 연초에 휴가를 붙여쓰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물론 며칠째 특별히 하는 일은 없다. 이불 속에서 나오지 못한 채 꿈틀거리다가 텔레비전을 보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해가 저물면 남편과 술 한 잔 기울일 뿐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는데도 머리가 무거웠다. ​ '세월호를 어떡하지.' 이 질문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아서다. 아니 그냥 툭툭 떠올랐다. 세월호란 세 글자가 부지불식간에 나타나서 괴롭혔다. 뭘 하고 있는 거냐고, 결국 넌 '거리두기'라는 허울좋은 구실만 대다 이렇게 잊고 있는 것 아니냐고, 결국 또 다시 시간에게 패배하고 있지 않냐고. 다이어리에 '다시, 세월호'라 적고 몇 가지 메모를 해두기도 했지만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 사이 2015년이 왔다. 이상하게도 올 .. 더보기
어떤 2년 기자로선 좋은 경험이었다. 시작부터 크게 한 건 터진 정부였다. 오피스텔 복도에서 밤을 지새우리란 상상도 못 한 채 역삼동으로 향한 게 2년 전이다. 2013년 4월엔 진주의료원이 문을 닫게 됐다. 난생 처음 닿은 경상남도 진주 땅에서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 기후변화 관련 취재를 하던 날, 통합진보당 사람들이 내란음모사건으로 압수수색 받는다는 소식을 접했다. 별 생각 없이 국회에 갔다가 이석기 의원 체포동의안 처리를 봤고, 나중엔 그의 구속영장 발부와 1심 재판 상당부분을 목격했다. 푸시알림으로 뜬 '정당해산심판 청구'란 말에 '뭔 소리지?' 했던 지난해 11월 5일 하루는 참 정신없었다. 그 사이 국정원 대선개입사건 1심은 진행 중이었다. 이 재판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다. 약 1.. 더보기
사소해서 미안한 사람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것처럼 사소한 일이나" 싶은 게 가족이다. 그래서 참 잘 못하고 산다. 어릴 적엔 아빠한테 많이 혼났다. 엄마는 한숨을 푹 내쉰 적도 있다. 동생과의 싸움은 그토록 잦았고, 스무살을 넘겨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누구보다 내게 '거리'가 필요한 존재였다. 내 동생 Mi Hee Park은. 밥먹는 일만큼 다투곤 했다. '너는 왜 음식쓰레기를 안 버리냐, 애써 만든 카레에서 왜 당근만 골라먹냐, 언니는 왜 물건을 이렇게 정리하냐, 니꺼 더러워서 안 건드리니 내꺼 건들지말아라.' 그 잦았던 다툼이 이제는 후회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복잡미묘한 감정이 들고 그렇다. 돌이켜보면 정말 헛웃음이 나올 만큼 유치한 이유들로 죽네사네 했으니까. 그래서 오늘 참 많이 동생.. 더보기
결국 내 몫이다 와 , 를 읽고 있다. 어쩌면 내가 기자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이 책들이 말하는 이야기들 속에 조금씩 스며들어있는지 모르겠다.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그것이 얼마나 반짝거리고 있는지를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그 빛을 가리고 있는 수많은, 거대한 것들을 걷어내고 또 걷어내야 한다. 알고 있었지만, 어렴풋이 짐작만 했다. 현장에 서서 내가 놓치는 것들, 잊어버린 것들, 눈감아버리는 것들을 목격한 후에야 실감한다. 기회는 아직 있다. 늦지 않았다. 다만 그 기회를 잡는 것은 결국 내 몫이다. 여건은 그닥 나쁘지 않은 편이라 생각한다. 불만이야 하면 끝이 없는 것이겠지만, 적어도 지금 두 발을 딛고 있는 곳에서 제대로 서있는 일이 중요한 것 같다. 일단은 그렇게 해보기로 .. 더보기
꿈에서조차 두려웠던 일 임신한 꿈을 꿨다. 벌써 두 번째다. 그런데 꿈 속 내 반응은 지난번과 다르지 않았다. '말도 안 돼'라는 표정까지. 꿈 이야기를 처음 들려줬을 때 남편은 "근데 좀 슬프다"고 했다. '기쁜 소식'이라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거 아무리 따져봐도 불가능한데요"라며 당황스러워했다는 내 말에. 하지만 정말이지, 자신이 없었다. 최소 1년은 더 일에 집중하고 싶고, 성과를 올리고 싶은데 일단 몸이 변한다면… 포기할 것들이 많아진다는 생각이 그 대신 얻게 될 기쁨이 있다는 생각보다 앞섰다. 이번은 조금 달랐다. '일과 육아를 함께 할 수 있을까'에 두려움 하나가 더해졌다. 얼마 전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선배와 밥을 먹으며 자연스레 아이 얘기를 했다. 선배는 한 명만 계획하고 있다면서도 출산이 "이런 세상에 얘를.. 더보기
"성호가 기다렸던 그 미사였는데..." 심성이 곱지 못해, 교황님 방한을 두고 호들갑 떠는 모습에 계속 틱틱댔는데. 어쩔 수 없었다. 울컥했다. 유민 아버님 만나는 광경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장면은 뒤늦게 동영상 자료로 봐서 좀 감회가 덜 했다. 근데 유족분들한테 이 광경을 어떻게 보셨냐고 전화로 묻는데... "우리 성호가 기다렸던, 우리 가족이 약속했던 미사"라는 어머님 말씀에 말을 잇기 힘들더라. 기사엔 다 녹여내지 못했는데 아까워서, 공유 차원에서 올린다. 단원고 고 박성호군 어머님과 짧게 나눈 대화 내용이다. 어머님 말씀대로 성호군이 하늘에서 이 미사에 함께 했겠지...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23934 "(오늘 교황님이 유민 아빠와 만나셨는데)너.. 더보기
매주 세월호를 탄다 내 일이 무섭다는 걸 실감한 때는 올해 초였다. 선배 지시로 강기훈씨 유서대필사건 일지를 정리하기 위해 네이버 옛날신문라이브러리에서 검색을 시작했다. 사실 이 서비스를 처음 쓰는 건 아니었다. 예전엔 1920년대 신문까지 찾아서 기사를 쓴 적도 있었으니까. 그땐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기사 정말 똑바로 써야지.' 강기훈씨를 유서대필사건의 주범으로 '몰고' 가는 기사들, 그 끝머리에 선명히 박혀있는 바이라인을 보며 나는 무서워졌다. 몇 십년 뒤, 아니 내가 죽어서도 나는 기사로 남는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지금도 가끔 누군가와 비슷한 주제를 두고 얘기를 할 때면 난 꼭 이 경험을 언급한다. 물론 누구나 그렇듯 다짐은 쉽고, 실천은 어렵다. 어쩌면 몇 십년 뒤가 아니라 몇 달, 혹은 며.. 더보기
삶들이 포개어져간다 오늘 페북에 끄적거렸던 글. 요즘 문득문득 가만히 들여다본다. 예전처럼. 유체이탈한 기분으로 나를. 더 많이, 자주 들여다봐야할 것 같다. ============== 고등학교 때는 빨리 스무살이 되고 싶었다. 모두들 친절하고 다정다감했지만 강남 한복판, '사교육 1번지'라는 곳에서 나는 하루하루를 싸워내는, 버텨내는 기분으로 보냈다. '고군분투'란 사자성어는 꼭 내 얘기 같았다. 끝없이 바람이 부는 마음을 잡으며 스무살을 꿈꿨다. 바람이 계속 불던 대학 초 상황 역시 다르지 않았다. 스무살은 덧없이 사라졌다. 무엇을 기대했고 어떤 것들을 이뤄냈는지 기억조차 희미하다.그때엔 '삼십 세'란 말이, '서른 즈음에'란 말이 참 부러워보였다. 지금이 아니라면 괜찮을 거라고, 여기가 아니라면 나아질 거라고 믿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