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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모호하고 정확한

꿈에서조차 두려웠던 일

임신한 꿈을 꿨다. 벌써 두 번째다. 그런데 꿈 속 내 반응은 지난번과 다르지 않았다. '말도 안 돼'라는 표정까지.


꿈 이야기를  처음 들려줬을 때 남편은 "근데 좀 슬프다"고 했다. '기쁜 소식'이라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거 아무리 따져봐도 불가능한데요"라며 당황스러워했다는 내 말에. 하지만 정말이지, 자신이 없었다. 최소 1년은 더 일에 집중하고 싶고, 성과를 올리고 싶은데 일단 몸이 변한다면… 포기할 것들이 많아진다는 생각이 그 대신 얻게 될 기쁨이 있다는 생각보다 앞섰다. 


이번은 조금 달랐다. '일과 육아를 함께 할 수 있을까'에 두려움 하나가 더해졌다. 얼마 전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선배와 밥을 먹으며 자연스레 아이 얘기를 했다. 선배는 한 명만 계획하고 있다면서도 출산이 "이런 세상에 얘를 던져버리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그 한 마디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정말 걱정됐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해"란 말을 아무런 이질감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한국 사회에서 과연 내 아이는 행복할 수 있을까. 아니 행복은커녕 자존감을 잃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 미친 세상'의 삶을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힐링과 행복, 복지를 말한다. 귀농이나 비혼, 여행이라는 수단을 택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잘 알면서도 외면한다. 기회가 사라져가고 대화보다는 불통과 아집만 남아 저마다의 일방통행성 욕망들로 채워져가는 현실을. 진보냐 보수냐를 떠나 누군가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꼰대가 되어가는 자신을. 동시에 가진 자들은 더 세련된 모습으로 관대를 베풀고, 덜 가진 자들은 '아귀(餓鬼)'로 변해간다. 지난한 일상, 달라지지 않는 현실, 높아져만 가는 격차에 좌절하며 헐벗은 삶에 하염없이 허덕이는 그런 존재로 말이다.


'어딘가 잘못됐어.' 모두들 말한다. 싸우는 사람들도 있다. 고민하는 이들 역시 도처에서 보인다. 그럼에도 절망스럽다. 사회를 바꾸려면, 결국 우리는 법과 제도를 건드려야 한다. 광장의 정치는 분명 한계가 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정식으로 대결해야 한다. 문제는 그럴 역량이 과연 있냐는 것. 상세한 답은 할 필요가 없다. 입만 아플 따름이다. 누군가는 그렇기에 우리가 광장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광장을 한 번 둘러보자. 그곳 역시 다르지 않다. 싸움의 기술은 낡았고, 목소리가 큰 사람들은 그 안의 '가진 자'들이다. 광장이든 어디든 꼰대들은 무능하고,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한때 뜨거움을 갖고 권위주의에 맞서고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했던 선배들의 엉덩이는 점점 무거워지고 귀는 닫히고 있다. 그 모습에 입을 닫는 나 역시 언젠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책상 앞에 앉아있을까 겁이 난다.


물론 열 사람의 한 걸음은 중요하다. 개인은 작고 소극적이다. 한 사람의 열 걸음은커녕, 열 사람이 발을 떼는 일조차 쉽지 않다. 하지만 여기에도 어떤 힘이 필요하다. 최소한 두려움은 떨쳐낼 수 있어야 한다. 이 한 발자국이 분명 우리를 어딘가로 끌고 가리라는 막연한 믿음도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의 20대, 30대들에게 과연 그 힘과 믿음이 있을까? 두려움을 극복할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나 역시 흔들린다. 점점 겁이 난다. 일상에서조차 싸우기는커녕 눈감아버리는 일이 잦다. 조그만 일들에 대한 분노는 잦아진다. 설렁탕집 주인에게, 이발쟁이에게, 야경꾼에게 옹졸하게 분개했던 시인처럼. 그 두려움을 어떻게든 이겨내고, 큰 일들에 분노하며 내 몫의 한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마음 한 구석을 파고드는 처연함이 잦아들지 않는다. 또 다시 임신하는 꿈을 꿔도 그 때 내 반응이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서, 아니 현실에서도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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