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선비가 정월 초하룻날 앉아서 일년의 양식을 계산해보면, 참으로 아득하여 하루라도 굶주림을 면할 날이 없을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그믐날 저녁에 이르러 보면, 의연히 여덟 식구가 모두 살아 한 사람도 줄어든 이가 없다. 고개를 돌려 거슬러 생각해보아도 그러한 까닭을 알 수 없다. 너는 이러한 이치를 잘 깨달았는가? 누에가 알에서 나올 만하면 뽕나무잎이 나오고,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울음소리를 한 번 내면 어머니의 젖이 이미 줄줄 아래로 흘러내리니, 양식 또한 어찌 근심할 것이랴. 너는 비록 가난하다고 하나 그것을 걱정하지 말라.
- 정약용, '윤종심에게 당부한다(爲尹鐘心贈言)' 중에서
"누에가 알에서 나올 만하면, 뽕나무잎이 나오고, 아이가 태어나 울면 어미 젖이 흘러내리니 가난함을 걱정하지 말라"고 다산은 말했다. '하늘은 먹을 것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키우지 않는다(天不生無祿之人 地不生無名之初)'는 옛 말도 있다. 하지만 제 먹을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실업급여를 타러 갔다. 지난주에는 헛걸음을 했다. 오후 2시에 관련 교육을 받고 신청서를 제출해야 접수가 완료되는데 고용지원센터에 도착한 시간은 한참 뒤였다.
날이 갈수록 통장에 찍힌 숫자 길이는 짧아지고, 크기도 줄어간다. 뽕잎이 절로 나오는 곳도, 젖과 꿀이 흐르거나 하늘에서 만나가 떨어지는 땅도 아닌 서울에 사는 백수는 알아서 밥그릇을 챙겨야 한다. 그래서 시간을 꼭 맞춰 집을 나섰다. 1시반을 목표로 출발했는데,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다. 부지런한 새는 먹이를 더 많이 먹을 수 있지만 부지런한 구직자가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진 않다. 하지만 '출금'으로 가득찬 은행 거래내역에 '입금'이란 두 단어가 또 한 번 찍힌다는 건 엄청난 일이다. 마음 한 켠이 찡하다.
급여를 받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3.4%, 올 2분기 실업률이다. OECD 회원국 평균이 8.2%인 데 비하면 양반이다. 근데 왜 이렇게 실업급여를 받으려는 사람들은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통계는 현실의 데깔코마니가 아니다. 한 번쯤 식당에서 고기를 굽는 아주머니로, 보도블록을 정리하며 흙먼지범벅이 된 아저씨와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김밥을 먹으며 일하는 알바청년으로 봤을 법한 사람들이 있었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모자라 석사학위까지 있는, 고학력 백수인 나와 함께.
누군가는 평일 오후의 노곤함을 쫓으며 달달한 믹스커피를 들이키고, 누군가는 오전부터 붙잡고 있어도 전혀 줄지 않은 업무량에 난감해하고 또 누군가는 퇴근길의 즐거운 데이트를 상상할 수요일 오후 두 시. 그렇게 우리는 2주에 다시 오면 7일치 급여를, 이후 4주에 적어도 두 번 이상 '적극적 재취업 활동'을 해야 또 다시 급여를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을 들으며 구직신청서와 재취업계획서, 급여신청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나마 2011년 9월 14일 오후 2시에 고용지원센터에서 교육을 받던 우리는 사정이 낫다.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는 건 최소한 전체 근로자 중 고용보험에 가입한 65% 안에 들어갔다는 의미니까. 비정규직이라면 더 행운아다. 800만 비정규직의 절반에게만 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나머지는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어도 구제받기 어렵다. 뽕잎은 절로 나지 않고, 젖은 때가 되어도 흐르지 않는다. 새삼 사회 시스템 안에서, 제도의 품에서 보호받는다는 일에 감사함을 느낀다. 행운이라고 해야 할까?
교육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어느 아주머니가 7천원짜리 스카프를 팔고 있었다. 카페에서 공부하거나 책 읽는다는 핑계로 커피 한 잔에 베이글이나 치즈케익을 더하면 계산기 숫자는 쉽게 7천원을 넘는다. 누군가의 엄마일 그녀는 땡볕 아래 도시락을 까먹으며 스카프 한 장을 팔려고 열심히 소리치고 있었다. 다산의 말이 좋지만, 이런 날에는 마음을 울리지 못한다. 처음 접할 때 그 명쾌함에 깜짝 놀랐던 '보편적 복지'니 '자본주의 4.0'이니 하는 표어들도 그림의 떡으로 보인다. 누에도, 아이도 아닌 사람들은 그렇게 제각각 뽕잎과 젖을 찾아 애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