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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마음에 남아/보고 듣고 읽고 쓰다

이것은 현실이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 8점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창비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 자발적으로 모집에 응한 사람 ▲ 일본군의 `동지`이자 전쟁의 `협력자`로 묘사했다는 이유 등으로 논란을 낳았던 서적이다. 올해 초 이 책을 둘러싼 소송을 다룬 기사를 썼다. 워낙 뜨거웠던 사안인지라 그 기사는 포털 메인에 올라갔다. 거기에는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꺼려질 정도로 성적인 욕설이 난무하는.


레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읽는 도중 그 일이 떠올랐다. ‘세상의 절반’은 쉽게 공격자가 된다. 그들이 모두 폭력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쉽게 변한다. 박유하 교수의 책은 그 자체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지만, `그가 남자였어도 그 정도의 능욕을 당했을까?`라는 의문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던 이유다. ‘땅콩회항’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을 둘러싼 대중의 분노를 지켜볼 때의 감정 역시 비슷하다. 


악플로든, 유언비어로든 성적 비난대상이 되는 것은 대부분 여자다. 유무형의 강간과 살해를 두려워하는 것 역시 여자다. 책 제목이 `남자들은 자꾸 여자를 가르치려 든다`고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맨스플레인(Mansplain)`은 하나의 일화일 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그 아래에 깔린 `성(性) 역학`이다. 솔닛이 책 곳곳에 걸쳐 강조한 대목 역시 절반은 너무 쉽게 공포에, 폭력에 노출되는 현실이었다. 


생물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나 여성은 늘 열세였다. 쉽게 지워지고, 침묵당하는 존재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저항해왔지만 싸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여성 혐오 또는 비하는 일상에서 시시때때로 맞닥뜨릴 수 있는 폭력이다. 그것은 2015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김치녀’ ‘여혐’ ‘메르스갤러리’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 제이 하워드 밀러



‘현상’을 거론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현실이다. 


‘히스테리’라는 단어가 있다. 흔히 ‘노처녀’란 단어에 세트처럼 붙는 형용사다. 남자를 전혀 수식하지 않는 표현은 아니다. 8월 18일 오후 9시 21분 현재 네이버 뉴스에서 ‘노총각 히스테리’라는 단어를 치면 228건의 기사가 나온다. 하지만 ‘노처녀 히스테리’라고 검색한 결과는 412건이다. 이 용법은 단어의 유래에서 찾을 수 있다. 히스테리(hysteria)는 자궁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Hystera’에서 나왔다. 그리스 사람들은 여성에게 자궁이 있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격해진다고 믿었다. “정의상 남자들은 그 진단에서 면제되는(본문 156쪽)” 단어일 수밖에 없었다. 


행동으로도 알 수 있다. 늦은 밤, 골목길을 지날 때 뒤편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본 적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여자다. 남자들이 느끼는 감정은 ‘공포’보다는 ‘불편함’이다.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당하지 않을까 하는. 솔닛은 여기에 미디어와 대중문화가 결합하면 ‘강간문화’, 한마디로 강간이 만연한 환경이 만들어진다고 얘기한다. 지금 한국과 다르지 않다. 우리에겐 일베가 있고, 쇼미더머니가 있다. 양성 평등이 뒤처진다고 평가받는 다른 나라들의 풍경 역시 비슷하다. 


수십 년, 수백 년 전과 비교하면 세상은 분명 나아졌다. 1968년 베티 프리던이 말했던 ‘이름 없는 문제’는 2015년을 살아가는 ‘역사’다. 솔닛 말대로 그 시절은 오늘날과 엄청나게 다른 세상이고, 여자에게는 훨씬 더 적은 권리와 훨씬 더 작은 목소리가 주어졌던 시대였다. 성을 이유로 교육의 기회 자체를 박탈당하는 일은 아직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에서나 벌어질 일이니까.


하지만 여전히 여자들은 싸워야 한다. 우리를 가르치려고 드는 남자들과, 우리의 목소리를 더 높이지 못하게 막으려는 남자들과 오늘도 싸워야 한다. 




페미니즘의 출발은 ‘인간 해방’이었다. 인간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여자들의 투쟁이었다. “여자도 사람”이라는 급진적인 구호였다. 그러나 현실의 페미니즘은 인간이 아닌 성별에 갇혀있다.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경제·사회 문화적 차이를 없애야 한다는 견해, 남녀동권주의, 여권 확장론’이라는 표준국어대사전 정의처럼 이 단어는 지금도 성과 성의 대결 혹은 성 역학의 구도 안에서만 받아들여지고 있다. “세상은 엄청나게 바뀌었”지만 “앞으로도 더 많이 바뀌어야(200쪽)” 한다. 


솔닛은 그래서 ‘희망’을 말한다. 페미니즘의 역사는 조용하고 정체된 것처럼 보이지만 간간이 격동적인 변화의 시기가 끼어드는 “단속적 평형의 과정(196쪽)”이므로 우리는 어느 순간 이야기를 바꿀 수 있다고. 한 번 열린 판도라의 상자 속에서 빠져나온 것들은, 호리병에서 탈출한 지니는 도로 들어가지 않듯 이미 변한 것들은 되돌릴 수 없으니 우리에게 남은 것은 더 나아가는 것뿐이라고(211-212쪽). 오늘날 여성들이 직면한 위협과 공포들은 그만큼 우리가 전진하고 있다는 증거라고(218쪽). 


사실 너무나 교과서 같은 결론에 헛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마지막 장을 덮고 치워버릴 수만은 없었다. “성 역할의 전쟁” 속에서 ˝전진하고 있는˝ 사람은 곧 나이기도 하다.

http://sost.tistory.com2015-08-18T13:20:350.3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