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너는 내 마음에 남아/보고 듣고 읽고 쓰다

전쟁은 추상명사가 아니다



얼마 전 영화 <굿모닝 베트남>을 우연히 봤다. 로빈 윌리엄스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지난해 여름, 많은 언론은 앞 다퉈 그의 대표작을 소개했다. <굿모닝 베트남>은 그 활자들 사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작품이었다. 별 관심은 가질 않았다. 그저 그런 옛날 영화 중 하나로만 다가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즈음 나는 ‘1968년의 세계로 들어가 있었다. 영화는 마치 <1968년 2월 12일>과 닿아있는 작은 단서 하나를 건네주는 것 같았다. 제법 늦은 밤 시작한 121분짜리 영화였지만 끝까지 시청했다. 중간 중간 자리를 뜨거나 눈을 비비지 않기란 불가능했지만. 또 “굿바이 베트남”이란 말을 남긴 채 석양 속으로 사라지는 로빈 윌리엄스를 보며 찝찝함을 지울 수 없었다. 



<What a wonderful world> 멜로디 사이에 흐르는 베트남의 풍경들, "당신들은 먼 길을 와서 내 동료들을 죽였어, 당신들 눈에 우리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죠"라는 투안의 울부짖음만으로는 ’전쟁‘을 볼 수 없었다. 추상명사가 아니라 “사람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포탄이며, 구덩이에 파묻히는 시체 더미이며, 파괴되는 보금자리이며, 생사를 모른 채 흩어지는 가족(황현산)”인 전쟁은 영화 속에 아주 일부분만 담겨있을 뿐이었다. 


<1968년 2월 12일>은 그 전쟁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우물가에, 논밭에, 흔적만 남은 집 주변에 버려진 누군가의 아내, 아들, 부모. 가슴이 도려진 채 얕은 호흡을 이어가는 여자, 가족의 죽음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만 했던 아저씨. 그들이 전쟁이었다. 그리고 탕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을 앗아간 한국군 역시 전쟁이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1968년 2월 12일은 평화로운 베트남에서 ‘바람을 함께 맞던’ 두 마을, 퐁니와 퐁넛이 여느 때와 똑같지 않은 하루를 겪어야 했던 날이었다. 그곳은 발포가 제한된 ‘안전지대’였다. 한국군은 소총 방아쇠를 마음대로 당기면 안 됐다. 하지만 그들은 거침없었다. 6살짜리 응우옌득쯔엉은 입이 다 날아간 채 죽었다. 응우옌티쫑과 찐쩌는 아예 눈도 감지 못했다. 총을 맞고도 겨우 살아난 응우옌티탄은 내장 일부가 몸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레딘먼은 죽은 엄마의 차가운 젖가슴에 안긴 채로 발견됐다. 가슴이 도려 졌고, 왼쪽 팔에서도 피가 멈추지 않던 응우옌티탄은 다낭의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세상을 떴다. 이 모든 것이 전쟁이었다.


학살에서 살아남고 다친 팔을 치료받는 소녀 ⓒ 한겨레21


살아남은 자들 역시 전쟁을 온몸으로 감내해야만 했다. 동맹군의 살상에 가족을 잃은 남베트남 민병대원 응우옌싸는 전의를 상실했다. 1년 전 미군에게 성폭행당한 뒤 우물 속으로 던져진 어머니를 기억하던 쩐반타는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불 타버린 집들, 관이 부족할 정도로 수없이 쌓인 주검들... 11살 소년은 원수를 갚기로 했다. 그는 15살이 되자 유격대를 자원, 산으로 들어갔다. 적이 죽었고, 동료도 죽었다. ‘하얀 정글’에서 버텨야 했던 한국군들도 정상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병신’이 됐고, 누군가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촘촘한 기록들 속에 드러나는 고통 받는 개인, 그리고 세계를 보며 참담했다. 이것은 실화다. 겨우 40여년이 흘렀을 뿐이다. 퐁니·퐁넛을 겪은 사람들은 모두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가해자들의 침묵 탓에, 피해자들은 오랜 세월 숨죽이고 살아야만 했다. 그들이 입을 열기 시작한 일은, 마침내 ‘전쟁’이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것들이 더 많다. ‘짜 맞춘 수사’는 32년이 흐른 뒤에야 세상에 드러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누가, 도대체 왜’라는 단순한 질문은 좀처럼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끝나기는 할까? 이 질문 역시 유효하다. 고통, 지옥, 비극... 등의 추상명사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실이 곧 전쟁이다. 그 현실 속에서 인간의 이성보다는 광기를 대면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말로 모든 참상을 설명한다면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가해자였던 전쟁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한 채, ‘2월 12일’마다 ‘따이한(大韓) 제사’를 지내는 퐁니·퐁넛을 “거짓말”이라며 외면한 채 전쟁을 말한다면 이 단어는 철저히 추상명사로 남을 수밖에 없다. 끝날 수가 없다. 


지난 4월, 응우옌티탄은 한국을 찾았다. 피흘리면서도 살아남았던 소녀는 이제 중년이 됐다. ⓒ 정민규




'너는 내 마음에 남아 > 보고 듣고 읽고 쓰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것은 현실이다  (0) 2015.08.18
<소수의견>을 보고나서...  (0) 2015.06.28
반쪽짜리 동의  (0) 2015.05.20
재미없지만, 불길한 상상  (0) 2015.02.26
다시, 민주주의  (0) 2015.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