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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남은 몇 가지/휩쓸리기보다는

"후배들한테 '너넨 참 힘들겠다'고 한다"

슬럼프라기보다는, 생각이 많은 요즘. 문서 폴더 한 켠에 담아뒀던 김중배 선배의 강연 기록을 꺼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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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1 아이폰5 촬영, 색 보정.


# 사의도(思議道), 생각하고 의논하는 길. 신문·방송 나오기 오래 전부터 언론은 있었다. 그들(기성언론)이 ‘언론’이라는 명칭을 갖는 것까지는 용서할 수 있다할지라도, 그에 걸맞은 언론의 지평을 과연 펼치고 있느냐 하는 문제 의식이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민주사회가 진전하고, 새로운 미디어, 온라인 매체, 소셜 미디어, 개인 미디어 등이 새로운 공공성을 획득해 가고 있는데 왜 그들만이 언론이라는 거대한 명사를 특정할 수 있는가. 대단히 부당하다.


‘사이버스페이스, 가상공간’이란 말이 맞는가. 가상공간이 실제 세계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면 신문·방송도 가상공간이죠. 미국의 월터 리프먼이 ‘신문·방송에 보도되는 사건은 진짜가 아니라 pseudo event, 의사(擬似) 사건이다’라고 했다. 그게 정확한 표현이다. (사이버스페이스, 신문, 방송 모두) 의사 사건이란 점에선 다 비슷하다. 그런데 굳이 사이버스페이스라고 해야 하는지…. 언론의 개념을 우리가 다시 한 번 민주적으로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미디어나 SNS가 공공성 띤다는 건 세계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우리만 하더라도 강남역 물난리를 현장에서 포착한 사람들은 저널리스트가 아닌 시민들이었다. 미국 대한항공기 사고도 그랬다. 오사마 빈 라덴을 미국이 극비리 작전 벌여 죽였는데, 그때 이미 SNS에서 어떤 사람이 ‘오사마 빈 라덴을 체포하는지, 죽이는지 모르지만 매우 이상한, 비일상적 사태가 오사마 거처에서 확인됐다’고 세계에 알렸다. 사이버스페이스도 공공성 획득하고 있다는 점, 여기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오마이뉴스를> 필두로 새로운 미디어들이 리얼 스페이스, 실재하는 공간에서 우리의 말 길을 제대로 열어가는 운동을 시민과 함께, 그야말로 민주적으로 해나갈 수 없는가,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몇 사람 책에서 2008년 서울의 촛불집회가 하나의 중요한 사례로 제시되고 있는 걸 봤다. 참 재미있다. 당시 일본의 한 문화인류학자가 서울 촛불집회 참석한 13살짜리 소녀 인터뷰했더니 ‘동방신기 때문’이라고 했다더라. 팬사이트에 올라온 글 보고 왔다고. 요즘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연구해봐야 한다. 


# 거창하게 ‘말 길과 살 길 찾아서’란 제목 내걸었다. 애당초 ‘뒷담’으로 생각하고 왔지만, 그래도 이런 제목 건 이유는, 민주사회에선 말 길이 곧 살 길로 이어진다. 그런 연결성 갖는다는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다. 


민주 정치는 결국 말로 하는 거다. 말, 문자, 시위, 집회, 모든 표현…. 요즘 만화, 영화 쪽에서 활약한다. <먼지 없는 방>이라는 만화 있다. 삼성반도체 문제를 다룬 만화인데, 학자들 논문에나 붙어 있는 각주가 많이 있다. 만화를 이렇게 골치 아프게 그리나 했다. 그런데 반도체 공장의 ‘먼지 없는 방’을 설명하려면 전문용어가 필요했다더라. 


결국 우리가 살 길을 찾는 전제가 말 길이다. 근데 우리는 지금 말 길이 제대로 통하지 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는 말이 험해야 오는 말이 험하다’더라. 악다구니 써야 반응 있다고. 소통이 안 되는 시대, 기막힌 현상이다. 이러다 보니까 일베, 홍어, 뭐 오만 얘기가 다 나온다. 이게 험한 말을 해도 고운 말이 돌아오지 않으니까 점점 험한 말을 한다. 에스컬레이터되는 현상일 수도 있겠다고 봐. 


우리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하려면, 그 민주주의를 통해서 우리가 제대로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의 말 길을 제대로 열고, 다듬고, 그래서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이 고운, 그런 세상의 길을 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이른바 이념, 진보, 보수에 관한 문제가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니까 어떤 유력한 신문에서 저한테 청탁이 왔다. ‘진보인사가 박근혜 당선인에게 보내는 충고’란 주제였다. 그래서 “당신들은 어떤 기준으로 보수와 진보를 가르고 있고, 그 기준에 따라서 내가 어떤 사람이기에 나를 진보인사로 분류했느냐? 설명해주길 바란다”고 했는데 설명을 못 하더라. 그래서 “아니 틀렸더라도, 당신 신문사 나름으로 이 시대 한국사회의 진보와 보수라는 것을 무 자르듯 자를 순 없어도, 분류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갖고 있어야 하지 않냐”고 했는데도 설명 하지 못했다. 그럼 “신문사 입장을 정리해달라”했더니 소식이 없더라. 


우리나라에서 이 시대 진보와 보수의 분수령은 어떤 것일까. 그 고민을 하면서 한국 학자들이 쓴 걸 많이 찾아봤다. 그 결정판이 대학교수들이 집단적으로 쓴 <좌우파사전>이었다. 이 책을 봤는데, 이 양반들도 고민했더라. ‘진보와 보수 사전 만들려고 하는데 그걸 가르는 기준 찾기 어려워서 상대적 개념으로 <좌우파사전>으로 했다’고. 학문에 정진하는 연구자들도 고민하는데, 그런 고뇌도 없는 신문사, 방송사들이 진보와 보수를 함부로 말할 수 있는가. 이 폐해가 매우 심각하지 않나. 어떻게 보면 이념의 과잉이다. (사회) 갈등 북돋고 혼란스럽게 한다. 


# 묘안은 없지만 이런 말씀 드릴 수 있다. ‘많아지면 달라진다.’ 물리학자가 물리의 세계를 탐구한 결과를 요약한 말이다. ‘More is different.’ 그럼 많아지게 하려면 어떻게 할까요? 여러 가지 방법 있으리라 생각한다. 참여연대 행사에 갔더니 한 시민이 버스정류장 버스노선 표시판에 방향 스티커 표시를 했다. 한 펭귄이 선구자가 되면 다른 펭귄이 뛰어든다. ‘퍼스트펭귄’이라는데, 이 시민이 그 역할 했다. 그런 단서들이 처음에는 볼품없고 초라해 보여도 장대한 결실을 맺지 않을까.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생산자와 소비자가 구분되지 않고 혼합된 시대다. 특히 지난날에 말하던 ‘전문기자, 프로페셔널한 기자’, 제 자신은 물론이고 거의 없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정말로 프로페셔널한 기자가 필요하리라 본다. 그것이 여러분 같은 시민기자들이 일반 미디어 종사자과 적당한 역할 분배를 하면서 우리의 말 길을 살려가야 한다. 


# 젊은 기자들한테는 매우 험난하지만, 한편으론 고무적인 미래 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험난하다는 이유는 정말로 이 새로운 지식, 그리고 우리 인류사를 관통하는 지혜에 대해 많은 성찰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에 기반을 두고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 가져야 한다. 거기에 있어서 전문성 필요하다. 


그래서 후배들한테 ‘너넨 참 힘들겠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얼마나 더 명예롭고 또 민중의 지지·성원 받는 저널리스트가 되겠냐. 공짜 점심은 값어치가 없다. 공짜 점심 생각 말고, 정말로 젊은 기자들이 정진하면 새로운 저널리즘, 새로운 말 길의 영토 열린다. 


# 그런 소망 있었다. ‘내가 사는 때보다 우리 아들이 사는 시대, 그게 성급하면 적어도 우리 손자가 사는 시대에는 내가 살던 시대보다 더 나은 세상 물려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살았다. 새로운 문명의 실천기는 열릴 수 있다. ‘비관적 낙관론’ 갖고 정진해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