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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남은 몇 가지/휩쓸리기보다는

어느 혼혈인의 죽음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791


변진경 기자


한 지적장애인 혼혈인이 있었다. 미군 기지촌에서 태어나 48년을 살다 8월15일 숨진 고(故) 김종철씨. 무연고 장으로 치를 뻔했는데, 유일한 혈육인 동생 김민수씨(가명·39)가 나타나 빈소를 지켰다. 동생과 마을 사람 등이 증언한 김종철씨의 기구한 삶과 죽음을, 동생 김민수씨의 일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형이 죽었다. 2008년 8월20일 새벽 6시, 경기시 파주시 문산장례식장 5호실에 내가 서 있다. 영정 사진 속 형은 피부가 검고 입술이 두껍다. 상복을 입은 나는 평범한 한국계 얼굴이다. 우리는 어머니가 같다. 파주시 문산읍 선유4리 옛 미군 기지촌에 살던 어머니는 아홉 살 터울로 우리 형제를 낳았다. 형과 나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다. 다만 각자 아버지가 다르다는 건 안다. 형의 아버지는 흑인이고 내 아버지는 한국인이다.


우리 형제의 고향은 ‘미군 기지촌’이라 불렸다. 바와 클럽, 햄버거 집, 세탁방이 일렬로 늘어선 거리에는 늘 외출 나온 미군이 북적였다. 어릴 적 어머니가 집을 나간 뒤 우리 형제는 이웃의 한 할머니 밑에서 미군에게 껌을 팔며 생계를 이었다. 나는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마쳤지만 ‘10살 미만의 지능을 가진 흑인계 혼혈인’ 형은 초등학교 2학년까지만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1995년, 길러주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나는 고향을 떠났다. 그로부터 9년 후 미군 기지가 철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4년이 더 흐른 2008년 8월에는 48년간 고향을 지키던 형이 죽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돈이 화근이었다. 가족도, 집도, 정신도 없이 살던 형을 위해 마을 어르신이 모아준 기초생활수급비 1200여 만원이 형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동네 사람들 가게 물건도 날라주고, 물도 떠오고, 눈이 오면 동네에 쌓인 눈도 치우던 형이었다. 허드렛일로 한푼 두푼 마을 사람들에게 용돈을 받으며 살던 형은 1년 전쯤부터 술이 늘기 시작했다. 마을 재개발로 빈집이 많아지자 외지인이 싼 월세로 그곳에 들어왔다. 형은 그들 중 몇몇과 어울리며 매일 술을 마셔댔다.


형은 발가벗은 채 튕겨져 나왔다


형의 ‘술친구’ 중 한 명이 나쁜 마음을 먹었다. 정 아무개씨는 형 명의의 기초생활수급비 통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김종철’ 이름 석 자밖에 쓸 줄 모르는 형을 데리고 증명사진을 찍고, 동사무소·농협에 데려가서 통장 분실신고를 내고, 현금카드를 만들었다. 돈 400여 만원을 뽑아 자기 오토바이와 어머니를 위한 순금 팔찌, 아버지를 위한 손목시계를 샀다. 8월14일, 동네 주민이 신고해 정씨는 사기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그날 경찰서에서 동네 사람들은 형을 지적장애인으로 등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장애인 수당이 나오고 정씨의 처벌도 더 강해진다는 말에 다음 날 큰 병원에 가서 정식 진단을 받게 하기로 했다. 형을 이발시키고 속옷도 사서 갈아입혔다. 자고 내일 보자고 마을에서 만들어준 방에 형을 데려다줬다. 저녁에 형은 방을 나와 또 술을 마셨다. 자기 돈을 빼앗은 정씨와 또 다른 ‘술친구’인 김 아무개씨(50)가 형과 함께 있는 걸 주민이 목격했다.


이튿날인 8월15일 새벽 0시30분쯤, 마을 사람 5명은 김씨가 세들어 사는 방에서 형이 발가벗은 채 튕겨져 나오는 걸 봤다. 누가 세게 민 것 같았다고 한다. 형은 ‘퍽’ 소리가 날 정도로 머리를 땅에 크게 부딪친 뒤 의식이 없었다. 김씨가 형을 질질 끌어 방에 집어넣고 문을 잠근 후, 경찰이 왔다. 경찰은 당시 형이 눈을 뜨는 걸 보고 돌아갔다고 주장한다. 목격자들 말은 다르다. 열린 문 사이로 안을 쓱 보더니 ‘술 취했는데 자게 냅둬’라고만 했단다. 광복절인 그날 아침 8시40분쯤 형은 뇌출혈로 숨진 채 발견됐다. 김씨가 옆에서 자고 있었다. 저녁 때 함께 술을 마신 정씨가 경찰에 신고했다. 


마을 사람 몇몇은 김씨가 정씨처럼 형 돈을 빼앗으려다 죽인 것이라고 의심한다. 8월14일 밤, 정씨 사건으로 형에게 돈이 있다는 걸 안 김씨가 형에게 방 보증금 100만원을 빌려달라고 채근했다는 것이다. 형이 그날 밤 자기 통장을 관리해주는 ‘바비 할머니’(70) 집 앞에서 뱅뱅 도는 걸 누가 목격했단다. 평소 잔소리를 많이 하는 바비 할머니가 무서워서 형은 빈손으로 돌아갔다. 형과 비슷한 나이의 혼혈인 아들을 둬 형에게 애착을 가졌던 바비 할머니는 “겨울에 따뜻하게 잘 집 한 칸 마련해주려고 수급비를 모아줬는데… 이 돈이 종철이를 죽게 만들었다”라며 장례식 내내 흐느꼈다.


(중략)


사실 난 형이 끔찍이 싫었다. 밖에서는 착한 형이었지만 나에게는 폭력을 많이 휘둘렀다. 서로를 싫어했다. 같은 뱃속에서 났지만 씨가 다르다고 생각하니 형이 원수 같았다. 형이 때릴 때면 나도 피부색을 들먹이며 형을 욕했다. 친구가, 친구 여동생이, 친구 부모님이 나와 형을 안다는 사실 자체가 싫었다. 지금도 고향 친구 집에 가면 친구 부모님 앞에서 괜스레 주눅이 든다. 애를 셋 낳았는데, ‘저런 놈이 애를 뭘 그리 많이 낳았나’라는 눈빛을 보내는 것 같다. 1999년에 결혼한 아내도 내 형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내 아이들은 아직 삼촌의 존재를 모른다. 


매일 껌을 팔고 구걸하고 미군 벙커에서 자는 지긋지긋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나는 미군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와 형이 먹고살아가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줬다. 거지 취급하며 주든, 예뻐하며 주든 뭘 주는 건 그들밖에 없었다. 미군이 학대해도 내가 아쉬워서 구걸하는 것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형은 나보다 미군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장가 안 가냐”라고 물으면 “장가가면 뭐해, 깜둥이나 낳을 것을”이라고 대답했다고 청년회 총무가 전했다.


형도 가고, 선유4리도 곧 사라진다. 2년 전 근처 당동리에 LG필립스 협력업체 단지가 들어서면서 마을은 상업·주택 지구 재개발 붐으로 들썩였다. 부동산 가게가 40군데 개업하고 땅값은 평당 1000만원까지 올랐다. 8월20일 오후, 형 장례식을 치른 뒤 나는 드문드문 가게를 지키고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를 다녔다. 형에게 밥을 준 매운탕집 아주머니와 돈을 잘 쥐어준 철물점 아저씨, 아직도 눈물이 글썽이는 편의점 주인 부부 등 형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분들 앞에서 처음으로 내가 형의 동생임을 밝혔다. 이웃은 “형에게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라고 울었다. 형과 고향이 싫어 도망쳤던 나는 그들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바비 할머니와 형 유품을 갖고 승강이를 벌였다. 형은 빼앗기고 남은 수급비 800여 만원을 남겼다. 형이 죽자 사기 피의자 정씨가 겁을 먹고 이장님께 반환한 오토바이와 금팔찌·시계도 유품이 됐다. 형을 죽게 한 수급비는 장례비용으로 쓰였다. 내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남은 돈과 귀금속을 국가에 귀속시키거나 펄벅 재단에 기부하려 했다고 한다. 나는 절대로 받지 않겠다고 하는데 동네 분들은 조카가 학교 다니는 데 삼촌이 남긴 돈을 쓸 수 있으면 좋지 않으냐고 나를 설득했다. 그래도 받지 않고 떠났다.


8월20일 오전 10시 벽제 화장터. 형의 관이 불 속에 있다. 영정 사진을 가만히 본다. 죽기 바로 며칠 전, 사기 피의자 정씨가 돈을 빼앗기 위해 형을 사진관에 데리고 가 찍은 사진이다. 그게 영정 사진이 됐다. 마지막으로 형을 본 건 지난 설 때였다.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우연히 만났다. “밥 먹었어?” “응.” “요새도 술 많이 먹어?” “아냐.” “많이 먹지 마.” “안 먹어.” 형이 싫어 떠났지만, 살면서 형을 잊은 적은 없다. 나는 형의 시신과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