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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마음에 남아

운명의 변덕과 관계없이 꿋꿋한 사슴이 아름답다.

이주헌 미술평론가, '해직 두 해만에 돌아가신 아버지, 그리운 아버지' 중에서(2013. 1.7 <미디어오늘>


쿠르베, 피신 중인 겨울 사슴, 1866년경, 캔버스에 유채, 54x72.5cm, 리용미술관


밀레와 동시대의 화가인 쿠르베는 사냥을 좋아했다. 그는 사냥꾼의 눈매로 동물의 표정과 동작을 포착하고 이를 화포에 꼼꼼히 묘사했다. 그래서 쿠르베가 그린 동물들은 아주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물론 그렇게 사냥꾼의 시선으로 그리다 보니 그림의 동물과 화가 사이에서는 늘 긴장감이 느껴진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생명을 놓고 다투는 관계에서 날 선 긴장이 없을 수 없다.


쿠르베의 <피신 중인 겨울 사슴>은 수사슴 한 마리가 경계를 서고 나머지 사슴 두 마리가 그 보호 아래 체온을 나누며 웅크린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다. 경계를 서는 수사슴은 지금 매우 예민한 상태다. 바스락 하는 소리라도 들었는지 귀를 쫑긋한다. 혹시 천적이나 사냥꾼이 나타날까봐 걱정하는 그를 사냥꾼인 화가가 지금 등 뒤에서 바라보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경계를 해도 때로 피할 수 없는 위험이 다가오는 법이다. 저렇게 아름다운 자연 속에 저렇게 아름다운 자태로 서 있지만, 지금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붓 대신 총을 잡는다면 사슴으로서는 속수무책이다. 운명은 그런 것이다. 운명은 때로 나를 지켜주고 운명은 때로 나를 버린다. 운명의 그런 변덕과 관계없이 꿋꿋하게 자신과 가족을 지키려는 저 사슴이 볼수록 아름답다.


아버지는 1975년 3월 동아일보사에서 쫓겨나셨다. 병든 아내와 어린 삼남매를 먹여 살려야 하는 일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었다. 모진 현실 앞에서 아버지가 느낀 불안과 두려움, 외로움, 막중한 책임감이 그림의 저 사슴과 결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부단히 노력하셨다. 하지만 노력만으로는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슴처럼 착하고 온유하셨던 아버지, 당시 아버지가 느끼셨을 외로움과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컸을까?


1975년 3월 어느 날, 아버지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동아일보사의 출판국장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출판부 부장 대우로 있다가 그 며칠 전에 해임되셨는데, 바로 아버지의 직속 상사가 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두 분은 한참 이야기를 나누셨다. 손님이 돌아간 뒤 아버지가 어머니와 나를 부르셨다. 당시 나는 중학교 2학년생이었는데, 집안에 일이 있으면 아버지는 어머니와 의논하는 자리에 장남인 나를 부르시곤 했다. 아버지는 왜 직속 상사가 집으로 찾아왔는지 이야기하셨다.


1975년 3월 8일 동아일보사는 경비 절감을 이유로 아버지가 속해 있던 출판부를 비롯해 기획부, 과학부, 심의실 네 부서를 폐지하고 기자 및 사원 18명을 해임했다. 자유언론 실천 선언을 내고 정권과 대립해온 기자들은 이 조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세 알아차렸다. 경영상의 필요에 의한 구조 조정이 아니라, 자유언론 운동을 벌이는 기자들을 제압하고 통제하기 위한 본격적인 첫 행보였다. 기자들은 경비상의 문제 때문이라면 스스로 봉급을 깎을 터이니 해임을 철회하라며 농성을 벌였다. 그 상황에서 아버지의 상사가 아버지를 찾아온 것이다.


아버지는, 집에 찾아온 상사가 아버지에게 제발 농성장에 나가지 말라고 간청했다고 하셨다. 시간이 지나 사태가 잦아들면 회사에서 해임된 이들 가운데 아버지와 같은 이들을 우선적으로 복직시킬 예정인데, 젊은 기자들의 농성장에 나가 회사 눈 밖에 날 일을 왜 하느냐는 것이었다. 관리자 위치의 부서장인 한편 운동의 주동자가 아니었던 아버지를 회유하려 한 것이다. 사실 아버지도 당신이 회사가 휘두르는 칼의 직접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분의 말이 아버지를 더욱 자극했던 것 같다. 그 날 어머니와 나는 아버지가 계속 농성장에 나갈 것이고, 그로 인해 동아일보사로 복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중시하셨다. 독재 권력에 맞서 자유언론을 부르짖으며 투쟁하는 젊은 기자들을 그런 식으로 제압하려는 회사에 크게 실망하셨다. 또 그렇게 성실히 일해 왔던 당신을 회사가 필요에 따라 장기판 말 다루듯 도구적으로 취급하는 데 대해서도 분개하셨다. 아버지는 기자들 사이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큰 희생이 있을지 그때 충분히 예상하셨다. 마음과 피가 따뜻했던 아버지는 투쟁하는 후배들과 함께 거리로 나앉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는 해직 언론인이 되셨다.


해직 뒤 아버지는 동아투위 모임에 나가는 한편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하셨다. 집안 살림은 어려웠다. 모아 둔 돈이 없었을 뿐더러 오히려 적지 않은 빚이 있었다. 하지만 해직 언론인이라는 족쇄로 인해 아버지의 재취업은 쉽지 않았다. 쫓겨난 기자 대부분이 취직을 못해 어려움을 겪는다는 이야기가 계속 들려왔다. 정권 차원의 방해가 많았다. 서슬 퍼런 유신 시대에 해직 기자를 고용해 무슨 불이익을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기업과 사람들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히 아버지는 작은 출판사에 주간으로 취직이 되셨다. 낮에는 출판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집에서 번역 일을 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번역 일은 이전부터 짬짬이 하시던 것이지만, 이제 더욱 절실히 해야 할 일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애쓰던 것도 잠시, 이듬해 아버지는 폐암 진단을 받으셨다. 어머니와 어린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청천벽력이었다. 아버지도 앞이 깜깜하셨을 것이다. 해직 뒤 가까스로 집안 경체를 추슬러 가는 와중에 중병에 걸렸으니 얼마나 허탈하셨을까. 심장병으로 고생하는 아내에게 아직 다 갚지 못한 빚과 어린 자식들을 남기고 간다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싫은 일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던 어머니는 아버지를 교회로 인도하셨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따라 예배도 드리고 새벽기도에도 나가셨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나에게 한탄하듯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오늘 새벽에 아빠가 기도하는 걸 곁에서 몰래 엿들었어. 병을 고치게 해 달라고, 폐암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기도하는 내내 들어보니 윤경이(막내 여동생) 시력이 좋지 않으니 눈이 좋아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고, 너희들 항상 건강하게 잘 지내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더구나. 끝내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기도도 하지 않으시더구나.”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교회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기도하는 일이 생소하기도 했겠지만, 신 앞에 기도한다면서 스스로를 위해 무언가를 구한다는 게 아버지에게는 그렇게 쑥스럽고 계면쩍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기도 제목은 다 제쳐두고 오로지 아버지의 쾌유만을 위해 기도하시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 기도를 듣고는 맥이 다 풀려버린 듯했다. 어쨌거나 아버지는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성실히 나가셨다. 석 달밖에 살지 못한다는 의사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일 년여를 더 살 수 있었던 것은 두 분 사이의 깊은 사랑과 신앙의 힘이 한몫했을 것이다.


병중에도 아버지는 열심히 일을 하셨다. 병이 심해져 출판사도 나가지 못하게 되고 온몸에 암 세포가 퍼져 직접 만년필을 들 수 없게 되었을 때는 내가 아버지의 구술을 받아 번역 원고지를 채웠다. 아버지는 그렇게 해서라도 돈을 버셔야 했다. 당신의 구술을 받아 원고지를 채워나가는 고교 1년생 아들을 바라보며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내가 아버지를 업고 방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자리를 옮겨 드렸다. 수척해지신 아버지는 전혀 무겁지 않았다. 새 이부자리에 아버지를 뉘어드리자 아버지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우리 헌이 다 컸구나! 이제 내가 안심해도 되겠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어려 있었다. 아들이 이제는 어린아이만은 아니라고 느끼신 듯했다. 그 순간 나는 나이와 관계없이 이제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안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