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소설에 빠져 살던 때가 있었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일본소설 특유의 감성이 한국의 젊은 청춘을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대세는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 하지만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건 요시모토 바나나였다. 어쨌든 두 사람의 책을 꽤 열심히 읽었다.
하루키는 주로 단편을 많이 봤다. 그의 단편에는 20대 후반~30대 초반으로 짐작되는 시니컬한 남성이 자주 등장한다. 그 남자는 어김없이 두 가지 음식을 꼭 먹는다. 파스타, 그리고 맥주. 혼자 사는 이 남자는 뜨거운 물에 적당히 삶아낸 파스타를 (아마도 봉골레로 먹는 듯) 차가운 맥주와 먹는다.
하루키 글에는 이 드라마 같은 달달한 파스타는 없다. 그저 차도남의 봉골레(로 짐작가는 파스타)와 맥주가 있을 뿐. ⓒ MBC 드라마 파스타
미성년자였던 시절에는 '도대체 무슨 맛일까' 참 궁금했다. 이제 술은 맘 내키는 대로 언제어디서든 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됐는데, 여전히 파스타 + 맥주의 조합은 즐겨본 적이 없다. 치킨에 맥주는 셀 수 없다. 하루키의 책을 읽은 지 벌써 몇 년이 지난 터라 지금도 그의 소설에 파스타를 삶고 맥주를 마시는 차도남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암튼 지금도 '무라카미 하루키'란 일곱 글자를 들으면 난 가장 먼저 파스타, 그리고 맥주가 떠오른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다르다. 일단 '파스타&맥주'처럼 작가만의 코드로 등장하는 음식은 없다. 하지만 바나나는 아예 '부엌'을 주제로 소설을 썼다. <키친>이다. 검색을 해보니 한국에서 출판된 지도 벌써 13년. 사춘기 특유의 감수성과 허세에 젖어 책장을 넘기던 시간이 벌써 저만큼 흘렀다니. 스무살이 멀게만 느껴졌던 책 이야기를 하는 지금, 나는 스무살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제목이 <키친>인만큼 바나나 소설은 등장인물 자체가 부억, 그리고 음식과 연관이 있다. 주인공 미카게는 부엌이 곧 엄마 자궁처럼 편안한 사람이다. 나중에는 요리연구가의 어시스트로 일한다. 새롭게 가족이 된 유이치, 에리코와 함께 할 때에도 미카게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많은 마음을 줬던 공간이 바로 부엌이었다.
하지만 사실 이 소설의 어떤 장면이나 이야기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돈까스덮밥'이었다.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 위에 잘 튀겨낸 돈까스를 올리고, 거기에 야채와 계란, 그리고 까츠오부시장국으로 만든 소스를 끼얹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돈까스덮밥. 내 인생에서 가장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려졌던 소설 속 묘사였다. 그 후 우연히 미소야였던가? 암튼 일식돈까스전문점 메뉴판에서 돈까스덮밥을 발견했을 때 어찌나 설렜던지.
소설 속에서 그려진 것과 닮은 돈까스덮밥은 아직 만나지 못했다. 물론 사먹거나 해먹은 것도 맛있긴 하지만. ⓒ 경민꼬맹의 푸드톡톡 http://blog.daum.net/tomato2130/
음식은 참 많은 걸 이야기한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똑같은 김치찌개여도 그 속에 담긴 이야기가 제각각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먹는 길거리 떡볶이는, 일 때문에 썰어 넘긴 스테이크 한 점과 비할 수 없다. 늦은 밤 까만 방구석에서 비벼먹는 식은 밥 한 덩이에 담긴 외로움은 그 한 숟가락을 삼켜본 자만이 알 수 있다.
소설 속 음식들도 아마 그럴 것이다. 파스타라는 간편하고 혼자 해먹기도 좋은 음식은 주변 일에는 무심하고 통 자기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어딘가 나약하면서 시니컬한 하루키의 남자주인공들에게 잘 어울리는 요리다. 여기에 맥주까지 더해지면 남자의 일상적 고독감은 배가 된다. 바나나의 <키친>은 아예 그것이 미카게와 유이치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중요한 '끈'으로 등장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누군가 떠오른다면, 그만큼 그 사람을 보듬어주고 싶고 더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싶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음식이야기가 좋다. 그 속에 담긴 수많은 시간과 공간들, 당신과 나의 이야기들을 어느새 상상하게 되니까. 젓가락을 대면 톡 터져버리는 계란 반숙에도, 퉁퉁 불어버린 라면에도, 바글바글 끓여낸 된장찌개에도 다양한 삶과 사람과 감정이 담겨있다. 물론 가끔은 입맛을 다시게 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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