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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

'낀 세대'가 읽은 <피스메이커>

사람들은 우리를 '88만원 세대'라고 하는데, 그것보다 '낀 세대'란 표현이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분명 나는 국민학교에 입학했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땐가 4학년 땐가부터는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외환위기라는 '고난의 행군기'와 한일 월드컵이라는 '환희의 순간'을, 고작 5년의 시차를 두고 경험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니 교과서가 칼라로 바뀌었다. 대학에 들어오니 어느새 '신자유주의'란 말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런 저런 격동의 순간들 중에서도 제일 강력한 기억 하나가 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쳤던 이승복 어린이를 본받아야 겠다며, 해마다 6월이면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이란 노래와 함께 '6.25 동란(혹은 남침)' 비디오를 보며 반공교육을 받았다. '자나깨나 간첩조심'급의 촌스러운 표어와 간첩을 괴물로 형상화한 포스터를 그린 적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학교에선 '반공 포스터·표어 그리기' 대회를 더이상 하지 않았다. 중3의 여름날, 텔레비전 어느 채널이든 같은 장면이 나왔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하는.

그렇다. 고작 20 몇년을 살면서 겪었던 몇몇 전환기 중 중요한 일이 바로 남북 관계의 변화였다. 북괴, 반공 등등의 말보다는 화해와 협력 그리고 민족이 강조되는 남과 북. 이제 사람들은 북한이 핵 실험을 하고 로켓을 발사해도 마트에 몰려가 사재기를 하거나, 전쟁이 일어날까봐 불안해하지 않는다. 아무리 한국어버이연합 어르신들이 김대중 대통령을 헐뜯어도, 그의 가장 큰 업적이 적대적이던 남북관계를 화해·협력의 관계, 그리고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계로 탈바꿈한 것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에 가장 깊숙이 관여했던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이다. 사실 그는 국민의 정부 시절 국정원장과 통일부장관 등 요직을 맡기 전부터 남북 문제에 발을 깊숙이 발 담근 상태였다. 원래 그는 군인이었다. 육사를 나와 서울대와 미 육군특수전학교, 이스라엘 지휘참모대학 등에서 공부하고 육사 교수로 재직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자주적 기본군사전략'과 장기 군사력 건설계획인 '율곡계획'을 설계했다. 하지만 전두환의 쿠데타를 계기로 그는 군복을 벗고, 외교관의 수트를 입고, '평화를 지키는 사람(피스키퍼)'에서 '평화를 만들어나가는 사람(피스메이커)'으로 거듭난다.


 
<피스메이커>는 바로 그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남북기본합의서'를 탄생시킨 남북고위급회담의 전개과정부터 6·15 남북공동선언, 그리고 남북 화해협력의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으며 또 미-북 적대관계와 북한 핵문제 해결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언론보도로는 접하기 힘든 남북 문제의 뒷이야기를 담고 있어서인지 인명색인까지 포함해 746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임에도 책은 술술 읽히는 편이다. 냉전과 화해 협력 시대 사이에 '낀' 20대가 지금까지 이어져온 남북 관계의 큰 흐름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 같고.

무엇보다 이 책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는 '역사'다. "과거를 잊은 사람은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는 조지 산타야나의 한 마디가 가진 위대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고 할까? 1990년대부터 계속 돼 온 한반도 핵문제는 돌림 노래와 같았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가 대두되면 협상테이블이 만들어지고, 당사자들이 한 발짝씩 물러나면 문제 해결, 하지만 강경한 자세를 유지하면 협상 실패. 제네바 합의, 9·19 공동성명 등은 전자의 예고 1994년과 2006년 두차례의 북핵 위기 역시 비슷했다. 그때마다 남북관계 또한 급속도로 식거나 조금씩 온기가 돌고는 했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다.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을 가져왔던 냉전시대는 해체된지 오래고, 임 전 장관의 말대로 "공산주의는 이데올로기로서나 체제로서나 이미 존립가치를 상실"했다. 대립과 갈등, 전쟁의 지속상태로 남북 문제에 접근해서는 '온기'보다는 '한기'가 잦은 남북관계가 될 테고, 그것은 우리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746쪽에 걸쳐 계속 같은 메시지를 반복한다. "화해·포용이 답이다."

실제로 북을 '악의 축'이라고 지칭하는 등 강경 일변도의 대북정책을 펼쳤던 부시행정부, 그리고 '북한 붕괴 임박론'과 '선 핵문제 해결 후 남북관계 개선'에 기초한 대결정책을 운용한 김영삼 정부는 북한을 '다루는 데' 실패했다. '힘'으로 북한을 굴복시키려던 태도는 오히려 북한을 자극하고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켰을 뿐이다. 임 전 장관은 이런 '낡은 시대의 사상과 생각'을 버리고 '적극적 평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군사정전 상태에서 안보역량을 강화해 '소극적 평화'를 지켜온 옛날과 달리, 이제는 안보위협을 근원적으로 해소해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 우선 비핵화와 군비통제를 실현하는 등 안보위협을 해소하고 군사적 대치상태를 종식시켜야 한다고 그는 덧붙인다. 또 "통일은 과정"이라며 '법적 통일'에 앞서 상호 교류협력하는 '사실상의 통일상황'부터 실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체제' 구축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올 신년사설에서 북한은 과거와 달리 대미·대남 비난을 하지 않았을뿐더러  "조선반도의 공고한 평화체제를 마련하고 비핵화를 실현하려는 우리의 입장은 일관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전체제를 넘어 평화체제로 가는 길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 냉전구조'라는 큰 산을 넘어야 하는 탓이다.북한은 지난해 로켓 발사와 핵실험을 강행했고, 대청도 인근에서 우리와 무력충돌한데다 지난 27일엔 서해 상에 100여발의 해안포를 발사하기도 했다. 한편 남한의 보수정부(과연 '보수'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편의상)는 '일단 핵포기부터 하라'며 남북 대결구도로의 퇴행을 택했다. 협상의 기술은 오직 '핵 포기'뿐이며 바라는 건 '북 체제 붕괴'로 보인다.

임 전 장관도 "한반도 냉전구조는 남과 북의 불신과 대결, 미국과 북한의 적대관계, 북한의 폐쇄성과 경직성, 대량살상무기, 군사적 대치상황과 군비경쟁, 정전체제 등 여섯가지 요소가 복합돼 있는" 어려운 문제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 큰산을 넘어야 오랫동안 한반도 평화를 위협해 온 북한 핵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포괄적인 접근을 하면서 당면한 개별 현안도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해법을 제시한다. 수십년을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해온, 풍부한 경륜의 소유자가 말하는 해법이라기엔 지나치게 원론적인 느낌이다. 그러나 그만큼 남북 문제에 있어서 '원칙'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화해와 포용을 통해 북한의 '점진적 변화'를 꾀하며 평화를 만들어 가는 원칙말이다.

그럼 이쯤에서, 우리의 대통령님은 무슨 원칙을 갖고 있는지 묻고 싶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모습에서 '평화를 위한 화해와 포용'은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외신과의 인터뷰를 요리하듯 남북문제까지 자신의 정치 마케팅에 활용하는 모습만 있다. '정치인은 표를 생각하지만, 정치가는 후대를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아직 대통령은 우리에게 '정치인 이명박'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