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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모호하고 정확한

어느 '민주주의자'의 죽음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미사 중반까지 낡은 성당문이 계속 삐그덕댔다. 자리가 꽉 차 서 있는 사람들만 수십명이 넘었다. 어느 민주주의자를 보내는 자리였다.
 
추모미사는 처음이었다. 미사의 시작과 끝은 모두 그를 위한 것이었다.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치며 '그 분'께서 오시는 날을 준비한 사람,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가 복음말씀이었다. 그의 세례명은 즈가리야,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다. 민주주의를 기다리며, 그날을 준비할 사람들을 위해 먼저 준비하고자 택한 세례명이었을까? 궁금했다. 하지만 답해줄 그는 여기 없다.

화가 임옥상씨가 제작한 걸개그림 앞에 추모문화제에 온 시민이 촛불을 놓고 있다.ⓒ경향신문


함세웅 신부님은 그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시대의 야만에 짓밟혔던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그럼에도 고통을 이겨내고 평화와 민주주의를 외쳤던 이가 얼마나 위대했는지 말했다. 고인이 생전에 강조했던 세 가지 평화, 정의, 지혜를 언급하며 "고문에 시달렸던 사람이 정의가 아닌 평화를 먼저 말했다는 데 김근태의 위대함이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 9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참혹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비인간적이고 불법적인 고문에 의해, 동물적 능욕을 당했습니다. 본인에게 요구한 것은 항복입니다. 저를 깨부수겠다고 말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전기고문은 불고문입니다. 물고문으로 땀이 배면, 그때부터 전기고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엔 짧고 약하게, 그러다 점점 길고 강하게 전류 세기를 높였습니다."

"물고문이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질식해가는 것이라면 전기고문은 뜨거운 불인두로 지져서 바싹 말려 바스러뜨리고 돌돌 말려서 불에 튀기는 것입니다. 핏줄을 뒤틀고 신경을 마디마디 끊어내는 것 같았습니다."

"고문자들은 '최후의 만찬이다', '너 장례날이다'라고 협박하면서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델시 가방을 든 건장한 사내는 '장의 사업이 이제야 제철을 만났다. 너 각오해라. 민주화되면 네가 고문으로 복수하라' 이런 참혹한 이야기를 하며 전기고문을 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수용소를 연상했으며, 비인간적 상황에 대한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 고문자들은 고문을 하면서도 '시집간 딸이 잘 사는지 모르겠다' 등의 말들을 태연히 주고 받았습니다." 


사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지만, 어떤 사람인지는 모른다. 그럼에도 막연한 호감이 있었고, 2008년 총선 이후 흔적을 찾기 힘든 그의 모습이 궁금했다. 재작년 민주당 경선에서 '젊은 피'를 상징하며 떠오른 이인영 전 의원에 눈길이 간 후, 그가 김근태계임을 알았을 때 호감이 더 커진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다. 

부고 소식을 듣고 관련 기사들을 읽었다. 어린아이처럼 축구를 사랑했고, 맞지 않는 길이라면 결국에는 뒤돌아섰던 사람, '열 사람의 한 걸음'을 위해 먼저 열 걸음을 걸었던 사람이었다.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를 떠나 그의 죽음에 고개 숙이는 이유는 그 때문이리라. <조선>마저 신정록 정치전문기자의 '근조 김근태'라는 칼럼에서 "그만한 정치인을 보지 못했다"며 조의를 표했다.

신 기자는 지난 2002년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서 제주 16표, 울산 10표로 까마득한 꼴찌를 한 그가, 곁에 아무도 없던 그가 눈물 흘리는 모습을 봤다고 썼다. 오늘 아침 <MBC>라디오 프로그램,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아버지가 걸어오신 길이나 추구한 가치에 비해 정치인으로서 큰 날개를 펼치지 못한 것 같아서 사실 안타까웠고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아서 좀 야속하기도 했었다"고 한 딸 병민씨가 떠올랐다. 또 한 번 그에게 미안했다.

추모미사의 파견성가는 성가가 아니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란 민중가요였다. 미사 내내 코끝이 찡했는데, 마지막 노래를 부를 때 참기 힘들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모인 자리였다. 어느 민주주의자를 기리기 위해 함께 한 사람들이, 손을 맞잡고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함께 가자는 노래를 부르는 광경은 그 어떤 영화보다도 큰 감동이었다. 어쩌면 신념대로 살아온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동이 우리를 그곳으로 이끌었고, 또 다른 감동을 낳았을지 모른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투쟁 속의 동지 모아

함께 가자 이 길을 동지의 손 맞잡고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어차 넘어주고

사나운 파도 바다라면 어기여차 건너주자 

해 떨어져 어두운 길을 서로 일으켜 주고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마침내 하나됨을 위하여
 
-김남주 시, 변계원 곡, 황현 노래

한 여자의 남편이요 두 아이의 아버지였고, 수많은 사람들의 형이었던 어느 민주주의자는 그렇게 갔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들딸과, 얼굴 모를 사람들에게 "제가 원하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세상을 선물해주고(병민씨)" 떠났다.  이 짧은 글이, 작은 기도가 영원의 저편에 있을 그에게 드리는 감사의 표시임을 조금이나마 전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민주주의자 故김근태 의원님의 평화와 안식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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