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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모호하고 정확한

오늘 나는 조금 외로웠다.

치약을 사야한다는 핑계로 집을 나섰다. 검은 비닐봉지에 담겨 귀가한 것은 '매일 만나는 치아 전문가' 그리고 맥주 한 캔. 짭쪼름한 과자를 씹으며 쓴다. 오늘 나는 조금 외로웠다고. 

괜찮은 하루였다. 취재를 했고, 신문을 읽었고, 이것저것 뒤척이며 시험준비한답시고 몇 시간째 앉아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고, 기뻐 노래하라고 끝없이 반복되는 캐롤의 고문에 견디며 시간을 보냈다. 뒤늦게 숙취인지 모를 어지러움에 멍해졌다.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라 확인하는 일만 계속 됐다. 도처에 무의미한 것 천지다. 괜히 조세희를, 김수영을 탓해본다.

12월의 공기는 맵다. 말라버린 손끝은 갈라져 버린다. 어깨가 얼얼할 정도로 잔뜩 움츠린 채 거리를 걷는다. 옷자락에 붙은 털모자가 없다면 귀가 베일듯한 추위에 벌벌 떨었을게다. 스산한 바람이 가슴을 채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아니, 늘 그렇게 반복되는 계절병이라 여기면 담담히 견딜 수 있을테다.

그럴 위인이 못 된다. 문제는 늘 여기서 시작해서, 다시 돌고돌아온다. 철없던 시절, 철없이 찾아온 우울은 여전하다. 그저 '안녕, 또 왔구나'하고 나는 인사할 뿐이다.

화려한 조명으로, 발랄한 멜로디의 캐롤로 겨울은 제 차가운 손을 또 감춘다. 얼음장 같은 세월을 숨긴다. 하지만 알고 있다. 공기마저 얼어버릴 것 같은 이밤, 누군가는 거리에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또 덧없는 외로움에 떨고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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