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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끝을 벼리다

희대의 스캔들은 이제 그만

'희대의 이혼 스캔들', 그 왕관의 주인공이 바뀌었다. 이혼을 위해 국교를 바꾸고 스스로 교회의 수장에 올랐던 영국의 헨리8세에서 14년간 결혼사실을 숨기며 신비주의 전략을 고수해 온 대한민국의 서태지로. 지난 10여 일 동안 신문 지면과 포털 사이트를 가득 채웠던 것은 바로 그와 그의 전처와 그들을 둘러싼 무수한 이야기들이었다. '사상 초유의 스캔들'은 9시 뉴스까지 진출해 서태지와 이지아를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은 찾기 힘들게 만들었다. 비밀과 거짓말로 쌓여 있는 개인사에 수많은 사람들이 눈과 귀를 집중했다. BBK 사건 관련 보도가 허위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결난 일이나 금산분리 완화의 주춧돌을 마련한 격인 공정거래법 개정 추진 등은 그 열광의 10%는 얻었을까? 선뜻 답하기 어렵다.

헨리 8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천일의 스캔들'


사실 서태지-이지아 이혼 소송보도에서 나타난 언론의 행태는 새삼스럽지 않다. ‘보도 첫날 관련 기사 약 400건’이란 숫자는 “한국 언론은 첫째도, 둘째도 대중성”임을 다시 증명했을 뿐이다. 중세시대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언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말과 글이 자유롭게 소통되는 사회가 모두에게 이롭다는 믿음, 언론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보도로 '공익'에 기여한다는 생각에 공감한 덕분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언론은 '무엇이 사회에 보탬이 될 것인가'하는 고민보다 '무엇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을까'에 몰두하고 있다. 서태지와 이지아의 비밀 결혼과 이혼 과정은 누가 봐도 흥미롭다. 하지만 호기심은 채우면 끝일 뿐, 어떤 의미도 역사도 남지 않는다. 금산분리 완화나 저축은행 부실, BBK 논란 같은 거대담론들은 조금 다르다. 당장은 이해하기 힘들어도 어떻게든 사회에 흔적을 남길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기쁨이, 또 다른 이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 

14년 만에 알려진 두 사람의 과거는 연일 화제였다ⓒ 한경닷컴


“세상이 변했다”며 언론사들이 억울함을 호소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언론은 비판의 화살을 감수해야 한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전하는 게 본래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는 일은 의무다. 세상은 약자들의 말에 쉽사리 귀를 열지 않는다. 비정규직이 차별을 당해도, 청소노동자가 화장실 구석에서 쪼그리고 밥을 먹어도, 응당 있었던 일이라며 고개 돌린다. 제 목소리를 내며 권리를 찾겠다고 외치는 약자들에게 몇 안 남은 확성기가 바로 언론이다. 하지만 뉴스는 점점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들로 채워져 간다. 언론인 스스로 '낮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겠다'는 말은 교과서에 나올 뿐이라 자조한다. 자본과 권력에 지배당했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마비된 한국 언론'은 곧 그들의 책임이다.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않았다. 자본의 힘과 인터넷의 속도, 네티즌의 군중심리만 탓하며 서태지-이지아 이혼 소송 같은 가십거리를 다루는데 열 올렸다. 

무엇이 언론을 언론답게 하는가? 풍부한 자본, 정치권력과의 긴밀한 관계, 포털사이트 조회 수 1위 등은 언론의 힘을 키워줄 수 있어도, 언론을 언론답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결국 언론이 전해야할 것은 바르고 정직한 이야기와 약자들의 목소리'라는 점은 오랫동안 되풀이되어 온 말이다. 뉴스를 고르는 기준은 무엇보다 '공익'이어야 한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 뻔한 이야기들이 계속 전해지는 까닭은 단순하다. 그게 맞다. '맞긴 한데'라며 현실을 탓하기보다 '맞으니까 한 번 해보자'는 태도는 정녕 불가능할까? '희대의 스캔들'처럼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뉴스 외에 대량해고 후 어려움을 겪는 쌍용차 노동자들 이야기, 금융권력마저 장악하려는 재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듣고 싶다. 저마다 기다리고 있는 '한국 언론'의 모습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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