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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모호하고 정확한

몸이 변해야 한다, 그리고 믿어야 한다.


모든 변화는 새로운 인식을 의미하는데, 앞에 말한 것처럼 이는 '머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에서 발생한다. 알이 부화하여 나비가 되는 것처럼, 몸이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하는 변태(變態, metamorphosis)의 고통을 뜻한다. 금연, 다이어트, 일찍 일어나기, 관계·초콜릿·카페인·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기 등 보통 사람들의 수많은 결심과 계획이 대개 실패하는 것처럼, 자기 변태는 너무도 어렵다. 변태는 기존의 나를 유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위협적이며, 미래에 올 것이기 때문에 알 수 없어 두려운 것이다. 어렵지만, 모든 변태는 의미를 생산한다. 의식화는 '변절'이나 '전향'이 가능하지만, 변태는 형태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의식화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는 '변절'이 불가능하다.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후기 중에서

지난해 고미숙 선생님의 강의 때도 그랬고, 여기저기서 '몸이 변해야 한다'는 조언을 많이 들었다. 오빠도 요즘 들어 부썩 같은 말을 자주 한다. 생각해보면 운동을 시작했을 때도 그랬다. 몇 번의 움직임이 일상의 변화를 가져왔다. 머리가 맑아지고 얼굴이 밝아졌다. 좋아보인다는 얘기도 자주 들었다.

사실 여기서 말하는 '몸'은 단순한 체형이나 체질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정희진 선생님의 말을 빌리자면, 몸의 변화는 곧 인식의 변화다. 앎을 체화(體化)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움직여야 한다. 동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변한다. 그리고 사회가 변한다.

그럼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블로그를 시작한 뒤 써온 글들을 찬찬히 읽어봤다. 아이디어를 얻고 싶다는 이유가 컸지만, 올 한 해 지금껏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 궁금했다. 남북관계니 언론과 민주주의니 하는 심각한 얘기가 있었고, (내 의도한 바는) 남들 알듯 모를듯 소소한 연애사와 뎬무같던 사건들을 풀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내가 계속 걱정하고 두려워한 건... 나에 대한 믿음이었다.

알고 있지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몸이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오랜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핑계가 많았고 두려움이 컸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나는, 한계를 안다. 당장 내가 할 수 있고 할 의지가 있는 선이 무엇인지 아는 일이 중요하다.  내가 부끄러운 건, 그 알고 있는 '선'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믿음이 필요했고, 필요하다. 그 선에 닿을 수 있다는. 믿어야 한다. 몸이 변해야 한다. 불안에 잠식될 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