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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모호하고 정확한

잘 산다는 게 무엇이냐.

김규항.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그 사람에게 주목하게 된 건 <나는 왜 불온한가>를 읽은 후부터다.

"몸이 늙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정신이 늙는 건 선택할 수 있다"는 문장이 또렷히 남았다. 물론 그렇다고 '열혈독자'가 된 건 아니다. 애초에 나는 열혈독자가 될만큼, 무언가에 애정을 퍼부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므로,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애정을 남겨 두고 그 나머지 분 가운데 '지적 애정'을 줄 수 있는 범위에 그가 포함된 것이다. 여튼 그 뒤로 <한겨레>에 실리는 그의 글을 유심히 보게 됐고, <고래가 그랬어>란 잡지를 창간했단 소식을 들었을 땐 많이 궁금했다. 그 관심과 호기심은 지금도 여전하다.

얼마 전 그의 인터뷰집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를 읽은 이유도 그 애정덕분이었다. 재밌었고, 한결 가벼운 김규항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즐거웠다. 소설이든, 사회과학서적이든 책을 읽을 때나마 혼자 저자의 목소리를 상상하곤 한다. 활자로 느껴지는 목소리말이다. 김규항의 목소리는 늘 낮고 무거운 톤이었는데, '대화'로 이루어진 책이어서 그런지 좀 다른 느낌이랄까? 술술 읽혔다.

쉽게 쓴 시라고 나쁘다 할 수 없는 것처럼, 쉽게 읽는 책이라고 남는 게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끊김없이 쭉 읽어내려가는 동안 단상은 마구마구 튀어나온다. 갓 튀겨진 팝콘이 사방팔방으로 날아가는 것처럼. 그러다보니 읽고 난 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참 중요하게 느껴진다. <가장 왼쪽에서..>는 B급 좌파 김규항과 두 아이의 아버지 김규항, 386 운동권 출신 김규항 등 다양한 김규항들이 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하나다. 계급이 중요하고, 세상을 선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우리 안의 이명박'을 말해 온 그의 목소리는 톤이 여러 개로 나뉠 뿐, 내용은 같았다.

무엇보다 속이 후련했다. 목구멍에 뭔가 걸린 것처럼 불편함만 느꼈던 일들에 대해 명료한 설명을 들은 덕택이다. 그 중 백미(白眉)는 노무현과 이명박의 이야기. '놈현 관 장사' 논란을 겪으며, 그리고 지난 2009년 5월 23일부터 했던 생각들, 최근의 단상들이 난잡하게 얽혀 있었다. 500만 추모 물결이 나는 불편했고, 천안함 희생 장병들의 이름을 외치며 눈가를 훔치는 이명박의 모습을 '저것도 쇼'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ABR(Anything But Rho)'와 '이게 다 노무현때문'이란 말이 아무렇지 않게 쓰이던 날들이 연기처럼 흩어졌고, '이명박'이 '노무현'의 빈 자리를 대신하게 된 지 오래다. 민주주의의 후퇴, 파시즘의 부활 등등의 거대담론이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을 자극한다.

"이명박 정권은 사람들의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쾌감을 얻는 변태인가요?"라고 김규항은 묻는다. '적'이 있으면 승패에 관계없이 싸움이 쉬워진다. 그게 전부다. '싸우는 모습'을 유지하는 것, 그 원동력은 '적'의 존재다.

"(군사독재 시절로 돌아간다는 말에 대한 물음에) 이명박 정권을 공격하기 위해선 좋은 말 같지만 그 말이 우리 스스로를 후퇴시키니까요. 거듭하는 말이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가장 주요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놓치게 된다는 겁니다.
군사독재로 돌아간다고 이야기하고 실제로 그렇게 느길 만한 무지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건 시대착오적인 현상인 것이지 실제로 그 시절로 돌아가진 않아요. 초등학생들이 대통령을 쥐박이라고 부르며 노는 시절인데 그게 어디 군사독재 시절입니까.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지도 않고, 잘렸던 KBS 사장이 복권되기도 하고, 하여튼 어수선한 상황이긴 하지만 정치적 민주주의는 최소한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요. 그것마저 허물어지는 건 이제 대중들이 용납하지도 않고요. 시대착오적인 일들은 말 그대로 시대착오적인 일로 구분해서 공격하면 되거든요. 그런데 그런 시대착오적인 일들에 흥분해서 군사독재와의 싸움으로 돌려버리면 체제의 함정에 걸려드는 거죠. 정리하자면 군사독재가 아니라 군사독재풍의 신자유주의가 존재하는 것이고, 그걸 한쪽에선 진보풍의 신자유주의 세력이 보완하는 겁니다. 신자유주의 지배 체제를 흉한 부분과 덜 흉한 부분, 둘로 나눠 한쪽은 보수로 한쪽은 지보로 보는 구도가 계속되는 한 한국 사회에 희망은 없습니다."(142쪽)

"진보적이라는 사람들은 이명박 정권 대문에 못 살겠다고 말해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 반대 측면이 많죠. 이명박 정권 덕에 참 편해졌거든요. 너무나 쉽게 진보적이고 정의롭고 양심적일 수 있게 되었어요. 이명박 정권만 욕하면 되니까요. 말과 삶이 다르고 어지간히 타협적으로 살아도, 그래도 내가 저들보다는 낫다는 자기 정당성을 확실하게 안겨주니까 성찰할 일도 반성할일도 없는 겁니다."(184쪽)

나 역시 '반MB'의 목적이 '절차적 민주주의의 회복'이라 생각했다. 사회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수단 중 하나라고 믿어서, 이번 지방선거를 앞두고 고민하기도 했다. 김규항은 반MB의 목적이 그게 아니라 '자본화하는 체제와의 싸움'이라며 현 정부는 단지 김대중, 노무현 정권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자본의 편에 서려는 것뿐이라고 평한다. 결국 그가 '선'을 가르는 원점은 '신자유주의'다. 낡고, 거대해보이기만 하는 그 담론말이다. "또 신자유주의 타령이야?"라고 반응하는 사람들에게(나 또한 그들 중 하나) 김규항은 "신자유주의만 해결되면 모두가 행복진다는 게 아니라"고 솔직히 말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 삶을 규정하는 거의 모든 게 신자유주의인 건 분명하다"고 예의 그 단단한 목소리로 말한다(물론 이건 글로 느껴지는 그의 어투다).

 80년대식 거대담론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건 맞지만 "군사독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신자유주의 자본화가 밀려 들어왔을 때 거대한 것에 대해 말하기 힘든 사회가 되면서 "사회진보를 위한 유의미한 논의는 학술적인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사회가 미궁을 헤맬 수밖에 없게 됐다"고 말한다.  미시적인 일들로 각개전투를 벌이다 보니 '무엇을 위해서, 어떤 세상을 목표로 싸우고 있는가'란 중요한 질문이 사라졌고, 그 대답을 찾기 영영 어려워지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이명박'이라는 구시대적이고, 꽉 막혀있는 '적'과 대비되는, 네이트 댓글식으로 말해 '진정한 대통령'이 바로 노무현"이라고.  '놈현 관 장사'는 그 인식이 빚어낸, 자극적이고 격하지만 중요한 에피소드가 아니었을까? "'노무현 정신' 어쩌고 말들만 하지 말고 제발 한 번이라도 차분하게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좋겠다'는 김규항 말에 매우 공감한다. 500만 추모 인파를 보며 나는 숭례문을 생각했다. 남대문이란 단어가 더 입에 붙고, '국보 1호'란 일반상식 이상도 이하도 아닌 채 제 자리에 우뚝 서 있던 그 문은, 정작 잿더미로 전소된 이후에야 '진짜 문화유산'이 됐다. 일제가 제 편의대로 정한 국보 1호가 아닌, 사람들의 마음에 꾹, 자국을 남긴 '국보 1호'가 됐다. 드라마를 좋아하는 만큼, 사람들은 드라마 속에서 살아가길 원한다. 숭례문도, 노무현도 마찬가지 아닐까. 차라리 안희정 충남도지사처럼 '그냥 좋았다'고 말해라. 그럼 진심으로 당신을 믿겠다.

"노무현 정권 동안 죽어간 23명의 노동자도 기억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이) 그런 이야기를 강퍅한 태도라고 비난한다면 그건 노무현을 추모하는 게 아니라 아까 말한 대로 자기애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죠. 광신이었든 자기애였든 스스로 삶을 정화한 사람 앞에선 다 놓아드려야죠.…(중략)…노무현 정권의 공과를 분명히 보고 우리가 노무현을 넘어서는 것, 그 한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는 것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뜻을 잇는 것이란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193-194쪽)"

노무현을 넘어선다. 진짜 민주주의를 꿈꾼다. 추상적인 말들은 상징성을 갖지만 명확하지 않다. 옳은 내용이든, 좋은 뜻이든 가슴에 남기 어렵다. 결국 핵심은 "잘 사는 게 뭐냐(316쪽)"는 것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끝없이 반복되는 경쟁마다 승리하면, 돈을 많이 벌면 우리는 잘 사는 걸까? MB가 없어지면 우리는 잘 사는 걸까? 아니라도 답하겠지. 하지만 촛불집회에서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공화국'이다를 외치는 사람도 자신의 아이가 학원에 잘 갔는지 확인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외고 가고 싶다는 중2 아들의 말을 듣고 부인에게 "학원비 아끼지 말고 잘한다는 학원 좀 알아보라"했다는 <한겨레> 기자의 이중성은 우리 모두의 것이니까. 욕망은 사그라들기 어렵고, 변화는 한 번에 오지 않는다. 이상과 가치를 말하기보다는 좀 더 단순해지고, 솔직해지는 것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잘 사는 게 무엇이냐'는 고민을 잊지 않는 것, 그리고 '가장 아래쪽'을 잊지 않는 것부터.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힘은 여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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