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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모호하고 정확한

기억보다 망각이 힘세다

역사는 기억 대 기억의 싸움이다. 이긴 자와 산 자의 운명만큼 어떤 기억은 선명하게 살아남고, 어떤 기억은 깨끗이 지워진다. 후자가 되살아는 길은 또 다른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뿐이다. 제주 4·3과 광주민주화운동이 그랬다. 남의 손을 빌리긴 했지만 일제강점기에서 해방하지 않았다면 "알려줘야지, 우리는 계속 싸우고 있다고"라는 현실 속 안옥윤의 말은 누군가의 귓가에만 남았을 테고.


영화 '암살'의 안옥윤 ⓒ 케이퍼필름


역사를 권력투쟁의 대상에서 역사 그 자체로 만드는 방법이 있긴 하다. 다양한 관점의 제시다. 물론 여기에도 오류 가능성은 존재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부지런하지 않다. 하나의 책이 제시하는 하나의 관점을 온전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가 많다. 그러나 '한 놈만' 믿고 사는 누군가가 새로운 관점을 갖게될 가능성 역시 저버릴 수는 없기에 세상은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높이 산다. 옳고 그르냐를 떠나 당신의 생각은 그것대로, 내 생각은 내 생각대로 존중하자는 말이 민주주의 사회의 금과옥조로 여겨지는 이유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이 기본 원칙을 지켜내지 못했다. 2015년 11월 3일, 정부는 역사교과서 국정 전환을 확정했다. 밀어붙이기식 통치 앞에 국민은, 여론은, 가치는 힘이 없었다. 


남은 것도 없을까. 그렇진 않다. 투박하고, 촌스러워 썩 내키지 않는 방식이지만 여전히 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들에게 빚을 지고 살아간다. '저게 뭐야, 누가 가겠어'라는 말을 밥먹듯이 하지만, 정작 그들마저 거리에 나서지 않는다면 우리의 실망은 손쉽게 절망으로 바뀔 테니 말이다. 


검정화 VS 국정화 ⓒ 이희훈


마찬가지로 투박하고, 촌스러워 썩 내키지 않는 집회 취재 역시 '도대체 왜 써야 돼?'라는 말로 뭉개버릴 수는 없다. 그럼에도 계속 싸우는 사람들을 우리는 알려야 한다. 기록 없는 기억은 힘이 세다. 망각 앞에선 더더욱 연약하게 부서진다. 기억에는 노력이란 연료가 필요하지만 망각은 별다른 힘 없이도 잘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는 것은, 필요한 것은 기록이다. 누군가는 계속 싸우고 있음을 누군가는 계속 알려야 한다. 투박하고, 촌스러워 썩 내키지 않는다고 해도 기록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우리는 써야 한다. 이 당연한 일을 되새겨보는 지금, 나는 사실 낯간지럽다. 일상과 상투가 몸과 머리를 지배하면서 불만은 커지고 몸은 굼뜬 지 오래 아닌가. '부끄럽다'는 말을 쓰기조차 민망할 따름이다. 물론 이 감정조차 찰나로 끝나리라 확신한다. 


기자 개인만 그럴까. 하루살이로 나날을 버티는 언론들은 2015년 11월 5일 다시 새로운 먹이를 찾아나섰다. 이 현실은 오늘 후배가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한 장에 잘 드러나있다.



국정화 확정 발표가 있었던 정부서울청사 브리핑룸. 오늘은 국사편찬위원장과 국정교과서 대표집필자의 입장 발표가 예정돼있는데. 서있을 틈 없이 빼곡했던 어제의 기자실과는 다르게, 너무 한산한 분위기라 잘못찾아왔나 내내 불안했다.

황우여 부총리 말마따나 국정화 발표로 끝난 게 아니고 그들 위주의 사회 개혁이 이제 시작인 건데 언론사들은 어제로 모두 끝난 것인 마냥 하는 듯 하다.


썰렁한 기자실이 모든 것을 말해주진 않지만,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걸 안다. 정권의 호위무사, 국무총리가 등장한 덕분에 '그림'이 된 국정화 확정 발표와 달리 국사편찬위원장 등의 입장 발표는 썩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일정 등 여러 사정을 감안할 때 굳이 브리핑룸을 찾지 않아도 보도자료만 챙기면 된다고 생각한 기자들이 한둘 아닐 거다. 우리도 다르지 않을 테고. 


물론 다른 방법으로 '계속 싸우고 있음'을 알리는 기자들도 많다. 내 동료들도 어딘가에서 국정교과서 이슈를 이어갈 아이템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짜내고 있다. 하지만 오늘 브리핑룸의 한산한 풍경이 주는 서늘함과 그것이 반사하는 우리네 현실을 생각하면, 이 몇 자를 끄적이는 일조차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망각 앞에 연약한 기억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기록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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