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못지 않게 정파성이 강한 미국 정치. 빨간색 코끼리는 공화당, 파란색 당나귀는 민주당. 하지만 한국과 달리 미국은 어쨌든 토론과 협의는 가능... ⓒ The Inquisitive Mind
한국 사회는 '진영논리'가 지배한다. 언론이라고 다르지 않다. '불편부당'하게 '시시비비'를 가리는 보도는 모든 언론사가 본령으로 삼고 있는 원칙이지만 현실은 다르다. 다들 공개적으로 '우리는 이러네, 저러네' 말하지 않지만 모두들 알고 있다. A신문은 보수, B신문은 진보, C신문은 친정부·기업 등등... 매체비평글에서는 '보수지' 또는 '진보지'라는 표현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누구나 저마다의 눈으로, 저마다의 세상을 들여다본다. 언론이라고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얘기해왔듯 '100점짜리 객관성'은 존재하지 않아서다. 오히려 각자의 주관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회는 더 건강하고 역동적일 수 있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 중 하나가 '다양성'인 데에는 괜한 이유가 있지 않다.
문제는 경향성이 보도의 '이상한' 잣대로 작용할 때가 많다는 점이다. 갈등이 첨예한 사안일수록 우리는 저마다의 정답을 두고 싸운다. 건전한 토론일 때도 있지만 아닌 경우도 적지 않다. 아니, 매우 많다. 한국 사회는 갈등을 봉합하는 일에 서툴다. 양보로 합의점을 찾기 보다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서로 싸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론도 그 전장에 '선수'로 뛴다. 책에서 읽고, 학교에서 배웠던 '저널리즘의 원칙'은 원칙으로 머물 때가 많다. '선수'노릇은 당장 우리 편에 필요하다는 이유뿐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다는 현실적 문제도 있다. 후자는 쉽게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기자들은 누군가를 '까고', 누군가를 '빨아주는' 기사를 쓰곤 한다. 그 기사들이 얼마나 많은 트래픽을 끌어오느냐는 곧 우리 회사가 얼마나 이 전쟁터에서 버틸 수 있느냐와 맞닿아 있다.
진영 논리가 생존 문제와 복잡하게 얽히다보니 '원칙'만 틀어지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선 고민이, 토론이 쉽게 자리를 잃는다. 우리가 어떤 가치를 공유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사람들은 말하지 않는다. 단지 '헬조선'을 원망하고 또 원망할 따름이다.
내가 발딛고 있는 곳 역시 다르지 않다.
우리 회사는 '열린 진보'를 지향한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매일매일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며, 편집을 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그 '열린 진보'를 지향하고, 고민하는지 모르겠다. 몇 달 전 헌법재판소에서 성매매특별법 공개변론이 열릴 때만해도 나는 우왕좌왕했다. 앰네스트에서 성매매 비범죄화를 지지한다고 발표했던 날에도 비슷했다. 성매매 문제는 진보냐 보수냐를 떠나서 입장을 정하기 쉽지 않고, 그만큼 맥락을 알아야 하고 배경에 깔린 가치관들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결국 우리가 무엇을 지향하느냐의 문제로 이어져서다. 하지만 그런 고민과 토론은 없었다. "근데 우린 이걸 어떻게 봐야 하냐"라며 난감해하던 선배의 짧은 한 마디가 전부였다.
노동처럼 '쉽게' 입장을 정했던 사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장 잦아들긴 했지만, '노동개혁'은 우리 사회를 뒤흔들 중요한 이슈다. 하지만 여기에 얽힌 변수들은 복잡다단하다. 임금피크제만 해도 '정규직 부모가 자녀에게 일자리를 양보한다'는 명제로 단순하게 정리할 수 없다. 수명 연장에 따른 노년의 일자리 문제와 청년층의 '질 낮은' 일자리 범람 문제 등도 뒤엉켜 있어서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우리 안에선 그 어떤 논의도 없었다. 당장 이슈로 '터지니까' 거기 대응하는 데에 급급했을 뿐이다. 물론 지금 상황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성향'은 허상이다. 고민없고, 토론없고, 논의없는 '성향'은 더욱 그렇다. 이 덧없는 성향은 오히려 언론을 갉아먹는다. 제자리에 머물거나 혹은 뒤쳐지게 만든다. 그 책임에서 나도 자유롭지 않다. '이상'은 늘 손에 잡히지 않기 마련이라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하지만, 그래서 더 고민하고 숙지해야 함을 알기에 머리가 무겁다.
어떤 조직이든 '소통'은 중요하다. ⓒ Catalyst
이 씁쓸한 고백은 우연히 본 한 편의 글 때문이다. <뉴스페퍼민트>는 오늘 '조력 자살'에 관한 이코노미스트의 입장문을 소개했다.
불치병에 걸린 환자에게 의사는 죽음을 재촉할 약을 처방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이코노미스트>의 입장은 명확합니다. 국가가 개인의 삶에 최대한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이 삶을 마무리하는 시점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조력 죽음(assisted dying)’이 합법인 곳은 세계적으로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지난주, 영국과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이 문제가 다시 표결에 부쳐졌습니다. 1990년대에 모두 안락사를 인정하지 않았던 곳들이죠. 하지만 이번에는 결과가 달랐습니다. 영국 의회가 330대 118로 존엄사 법안을 부결시킨 데 반해, 캘리포니아 주 의회는 간발의 차이로 법안을 통과시킨 것입니다. 주지사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 한, 안락사 지원은 곧 미국에서 가장 큰 주에서 합법이 됩니다.
...(중략)...
조력 자살 합법화를 반대하는 진영은 여전히 큰 권위와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의료인협회가 최근 조력 자살 반대 입장을 철회한 것에 반해, 영국의 의사들은 여전히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여전히 모든 종류의 자살을 비난합니다. 영국 총리 역시 의회에서 이 문제가 논의된 것을 환영한다고 말하면서도,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가톨릭 신자인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이 문제의 중요성을 인정한다고 말했지만, 거부권 행사 여부는 불투명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주지사가 누리는 양심의 자유는 캘리포니아 주민들에게도 주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국가들도 개인의 삶이 당사자의 것인 만큼이나 죽음도 당사자의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조력 자살은 안락사를 원하는 사람에게 약물 등의 도움을 주는 일이다. 안락사 자체가 워낙 민감한 문제인데다, 조력 자살은 달리 말하면 '자살 방조' 혹은 '살인'이 될 수 있어서 영미권에서도 아직 논란이 진행 중이다. '자기 결정권'의 차원에서, '죽을 자유'와 연관지어볼 수 있는 문제는 결국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 큰 질문을 언론사 안에서 공유하고, 나름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성향' 아닐까. 서구 언론이 부러운 점이야 한둘이 아니지만, 허상을 좇는 데에 그치지 않고 현실로 만들어가는 문화도 정말이지 참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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