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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모호하고 정확한

'경향'을 생각하며

"대기업 보도 엄정히 하겠습니다."

오늘 경향신문 1면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경향신문은 지난 16일 고정필진인 김상봉 전남대 교수가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고 쓴 글을 게재하지 않았다. 사실 내가 편집장이어도 곤란했을 것 같다. 가령 임원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을 '머슴'에 비유한다던가 이건희 전 회장을 '짝퉁 루이 16세 폐하'라고 빗댄 부분은 '헉'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명박은 조질 수 있고 삼성은 조질 수 없냐"는 경향 막내 기자들의 글처럼, 이번 일은 정당하지 않았다. 게다가 '진보적 정론지, 독립언론'을 표방하는 경향인만큼 사람들의 배신감도 상당했다.(지난번 김용철 변호사 광고탄압 기사가 인터넷판에서 빠진 일도 있었고) 결국 경향은 오늘 솔직하게 고백했다. 우린 쫄아 있었다고, 하지만 앞으론 쫄지 않겠다고.

 

경향신문은 최근 본지 고정필진으로 참여하고 있는 전남대 김상봉 교수의 칼럼을 싣지 않은 바 있습니다. 김 교수의 이번 칼럼이 삼성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내용이어서 게재할 경우 자칫 광고 수주 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우려한 때문입니다. 편집 제작 과정에서 대기업을 의식해 특정기사를 넣고 빼는 것은 언론의 본령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한때나마 신문사의 경영 현실을 먼저 떠올렸음을 독자 여러분께 고백합니다.

경향신문 편집국 기자들은 이 일이 있은 뒤 치열한 내부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 진실보도와 공정논평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는 언론의 원칙을 재확인했습니다.

경향신문은 앞으로 정치권력은 물론 대기업과 관련된 기사에서 보다 더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겠습니다. 옳은 것을 옳다고 하는데 인색하지 않되, 그른 것을 그르다고 비판하는 것에도 결코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경향신문이 저널리즘의 원칙을 끝까지 지켜나갈 수 있도록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격려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쉽지 않은 고백이었고, 솔직한 반성이었던 만큼 인터넷판엔 경향신문에 대한 격려와 지지가 쏟아졌다. 여러 댓글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지면이 줄어도 괜찮다"는 말이었다.



재정상의 어려움이 문제라고 토로하신다면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그동안의 역사에서 정의의 가치를 구현한 사건이나 구성들은 권력과 물질에 의지하지 않았기에 그러한 평가를 받는것이라고.경향신문을 구독하는 독자로써 말씀드립니다. 지면이 줄어도 좋습니다. 다양한 볼거리가 사라져도 좋습니다.오직 진실만을 비추는 투명한 거울의 신문이길 바랍니다....


-김동준(로디너) 님


자기소개서를 쓸 때마다 "진실을 전하는 기자가 되고 싶습니다"란 말을 참 많이 우려먹게 된다. 말은 역시 쉽다. 김광진의 '편지' 노랫말에 "말은 자꾸 날아가는 느낌이 들어서" 편지가 좋을 것 같다는 내용이 있다. 어떤 면에서 글 역시 말이기에, 자꾸 날아가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애초에 기자가 되고 싶었던 까닭은, '진실 전달'이란 사명감 따위가 아니라 '난 글 쓰는 직업을 하고 싶은데, 소설을 쓸 만한 창의력이 없고' 또 '돈은 벌어야 하는데 스펙이 좋은 건 아니지만 글쓰기는 조금 자신있고' 같은 현실적인 요인들 고려한 게 컸다. 그래서 기자가 되고 싶은 이유에 답할 때마다 손발이 오글오글 거리는 기분이 지워지질 않는다. 물론 흔히 생각하는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환상이나 명예욕 같은 게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정말 쉽지 않은 길이고, 현실은 녹록치 않다는 생각이 점점 많이 든다.


밥은 먹고 살아야 한다. 굶어 죽을 수는 없다. 아무리 멋진 말로 포장해도, 기자도 결국 직업군 중 하나다. 아무리 멋진 말로 포장해도, 힘든 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그 어쩔 수 없음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때때로 더 큰 도덕성과 양심을 강요한다. 이 또한 기자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아무리 신문을 보지 않고, 뉴스에 무관심하다고 해도 '뉴스'가 갖고 있는 힘은 여전하다. 사회적 이슈의 출발점은 아직도 뉴스다. 그래서 기자는 직업이면서도 특권계층이라고 생각한다. 작년 여름 방학 세미나에서 제일 기억에 남았던 건 "새파랗게 젊은 초짜 기자여도 그 아버지뻘 되는 장관이 얼마나 정중한지 모른다"는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그리고 더 인상적이었던 건 "여러분을 보고 그렇게 대접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속한 '매체'때문에 그런 거다"라는 대목이었다. 기자가 되는 순간부터, 돈을 떠나서 '대접받을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는 것 또한 권력이다. 더이상 펜 하나로 세상을 바꾸는 시대는 아니지만, 적어도 세상을 흔들 수는 있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자본이 언론마저 지배하고 있다'는 말은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MB가 언론을 장악하려고 한다'는 말 역시 마찬가지다. 머리로 이해하지만, 가슴에 와 닿지 않는 말들은 결국 날아가버릴 수밖에 없다. 그건 나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닐거다. 앞으로 내가 쓸 기사들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하지만 솔직히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그냥 나는 계속 경계하고, 기억하고 싶은 거다. 적어도 나는 나를 바꿀 수 있으니까. 나를 계속 의심하고, 다그칠 수 있으니까.

작년에 조선일보 시험을 힘들게 치렀다. "붙으면 어떡할 거야?" "당연히 가야죠"라고 답했고, 그래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조선일보의 장점을 찾고자 부단히 애썼지만 마음은 계속 불편했다. 2008년이야 첫해니까 내 맘대로 썼지만, 부담감이 늘어난 만큼 '골라서' 지원하는 일은 어려웠다. 경영난 때문에 채용 공고가 뜬 언론사들이 적었던 현실도 한 몫했다. 결국 그 전해엔 "전 저랑 안 맞아서.. 그냥 안 쓰려고요"라고 자신있게 말했지만, 조중동 다 썼고, 운 좋게 실무평가까지 봤다. (조중동이 틀렸다, 나쁘다기 보다는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럴 경우 내 자신이 얼마나 스트레스에 시달릴지 뻔히 알기 때문에-이상한 성격상- 지원하지 않았었고, 안 하고 싶었다.) 밥벌이란 현실을 무시할 수 없는만큼, 꿈이라는 이상도 버릴 수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거다. 안다, 이건 철저히 답 없는 문제라는 걸. 안다, 계속 머리 아프게 고민해야 한다는 걸. 안다, 올해에도 조중동 입사지원서를 쓸지 말지 또 '일단 어디든 엉덩이 붙이려고' 원서를 쓸지 말지 고민할 거라는 걸. 다만 그 고민을 회피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가급적, 좋은 답을 찾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좋은 답을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아파하며 쓴 글들이 조금이나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된다면, 어떤 변화의 '시작'을 자극할 수 있다면, 그렇게 고민하고 아파했던 시간들이 아깝진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