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애매모호하고 정확한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얼마나 못났는지 알게 된다



"희완이 나를 여신이라고 부른 것처럼 나도 한편으로 그를 신처럼 거대한 존재로 여겨왔다. 함께 살면서 그는 점점 평범하고 나약하며 한없는 너그러움과 다정함을 필요로 하는 작고 어여쁜 한 인간으로 보인다. 내가 한 점 사랑을 건네면 장미 꽃처럼 활짝 향기롭게 피어나는 어여쁜 인간."

- 목수정,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며칠 전 그가 내게 했던 말도 비슷한 뜻이었던 것 같다.


"니가 먼저 전화했을 때, 난 의외라고 생각했어... 어쨌든 그 전화를 받는 순간 난 모든 게 다 풀려버렸다고."

나는 고집이 세다. 겸손하고 예의바른 척하지만, 사실은 매우 권위적이고 독단적인 편이다. 이타적인 체 함으로써 이기적임을 감추려 한다. 이런 가면들을 쓴 일상을 살아온 지 꽤 오래, 길게 보면 10년은 넘은 것 같다. '척'함을 그만 두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내가 '외로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가면을 벗고 날것 그대로의 나를 보여줬을 때 '어 이건 아니잖아'라며 누군가 등을 돌려버릴까봐, 그래서 남겨져버릴까봐 하는 두려움 때문에.

물론 완벽하게 나를 이해받기란, 혹은 타인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안다. 다만 나는 약간의 가능성을 믿을 뿐이다. 100%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런 가능성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한없이 약해진다. 하지만 한없이 강해진다. '내 사람'이라는 믿음이 나를 그렇게 만든다.

아버지는 늘 "남들한테만 잘하고 가족한테 못 하면 무슨 소용이냐"고 하셨다. 매번 그 말을 들을 때마다 1) 내가 뭘 못한다고 2)아버지는 역시 기성세대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첫번째 반발심은 내가 많은 걸 포기하고 희생해왔다는 데에서 오는 자부심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건 나의 나약함과 비겁함을 합리화하는 것이었을지 모르는데, 나는 그냥 그렇게 자위하고 있었다. 두번째 반발심은 내가 아버지와 다르다는, 나는 젊은이고 진보적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 같다. 하지만 보수성과 권위적인 것들에 대한 반발심만큼 나는 그것들을 내재화하고 있었다. 적어도 '내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내가 얼마나 못난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 그 깨달음이 하나 둘 늘어갈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살을 에일듯 차가운 바람에 볼과 귀가 떨어져 나갈 것같고, 손끝에선 아주 작은 온기마저 느껴지지 않게 만드는 그런 추위의 한복판에 던져진 것처럼 춥다.

하지만 그 고독한 추위과 아픔이 내가 뼈저리게 고통스러워야 할 괴로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아직은 나를 버티게 해준다. 그건 아마도 내가 한 점의 사랑을 건네면 장미처럼 활짝 피어나는 당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은 그런 장미같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의 고백이다. 그리고 그 고마움과 미안함을 망각하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애매모호하고 정확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학교를 떠난 그대에게  (5) 2010.03.15
정치성향 테스트  (0) 2010.03.08
'경향'을 생각하며  (5) 2010.02.24
굿나잇 앤 굿럭, 그리고 추노  (0) 2010.02.23
조금 늦은 후회 but  (0) 2010.02.17